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광주김씨시조(廣州金氏)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7세손 김녹광(金綠光)을 시조(始祖)로 한다.

작성일 : 2017-10-09 17:10 수정일 : 2020-04-08 15:22

광주김씨시조

광주김씨(廣州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인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7세손 김녹광(金綠光)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는 1236년(고려 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해 왔을 때 상장군(上將軍)으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시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가 봉군(封君)된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문호(門戶)를 열었으며, 녹광(綠光)의 아들 굉(閎)이 감찰 어사(監察御使)를 지내고, 손자 훤(晅 : 호는 둔촌, 감찰 어사 굉의 아들)은 당대의 명신(名臣)으로 명성을 떨쳐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혔다.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광주(廣州)는 경기도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으로 망명하여 회안국(淮安國)을 세우고 한왕(韓王)이 된 마한(馬韓)의 일부였다.

서기 371년 백제(百濟)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남한산(南漢山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이도(移都)하여 이 곳을 한성(漢城)이라 불렀고, 553년(백제 성왕 3, 신라 진흥왕 14) 신라(新羅)에게 나라를 빼앗겨 신라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서기 756년(신라 경덕왕 15) 한주(漢州)로 고쳤으며, 940년(고려 태조 23)에 지금의 광주(廣州)로 개칭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원종(元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훤(晅)은 1269년(원종 10) 사신(使臣)으로 원(元) 나라에 가서 원제(元帝)의 힘을 빌어 권신(權臣) 임 연(林 衍) 일당의 역모를 저지시켰고, 이듬해 금주(金州 : 지금의 김해) 방어사(防禦使)로 나가 삼별초(三別抄 : 고려 무신 정권 때의 특수군대)의 난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워 예부 낭중(禮部郎中)․도호부사(都護府使) 등을 거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내사문하성에 속했던 정2품의 관직)에 이르렀으며, 문장(文章)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다.

훤(晅)의 두 아들중 맏아들 남물(南物)은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지냈으며, 개물(開物)은 충숙왕(忠肅王)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역이하고 시(時)․글씨․그림에 모두 능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한 차문(次文)과 경연관의 참찬관(參贊官)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된 차문(次武) 형제가 유명했고, 상주 목사(尙州牧使) 경보(敬寶)와 강릉부사(江陵府使) 대근(大根),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희증(希曾)이 명문의 대(代)를 이었다.

특히 조선조에서 가문(家門)을 크게 일으킨 인물(人物)은 임진왜란 때의 명장(名將) 태허(太虛)를 들 수 있다.

그는 희증(希曾)의 아들로 태어나 1580년(선조 13) 무과(武科)에 급제, 옥포 만호(玉浦 萬戶)로 있다가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산 군수(蔚山郡守)로서 역전의 무공을 세웠고, 난이 평정된 후 선무1등 공신으로 도총관(都摠管)․호위대장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수겸(水兼)도 아버지를 따라 전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고 안동영장(安東營將)․중추부사(中樞府使) 등을 역임했다.

공조 참의 차문(次文)의 증손(曾孫) 기(琦)는 임진왜란 때 판관(判官)으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동래성(東萊城) 전투에서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훈련원정(訓鍊院正)에 추증되었다.

한편 양무공(襄武公) 태허(太虛)의 사촌(四寸)인 태을(太乙)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임하고 돌아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 수인(守訒)도 광해군(光海君)의 패륜을 개탄하여 향리로 돌아와 영남유학(嶺南儒學)의 중진으로 일컬어진 아버지 태을(太乙)의 학문(學問)을 이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광주 김씨는 진성(振聲)․석창(錫昌)․상윤(相潤)을 비롯한 많은 항일 투사를 배출하여 충절의 전통을 이어가문을 더욱 빛냈다.


광주김씨 인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 김씨(廣州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김 굉(金 閎) 시조(始祖) 녹광(綠光)의 아들. 고려조(高麗朝)에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하였다.

김 훤(金 晅) 1234 (고종 21) ~ 1305 (충렬 31) 자(字)는 용회(用晦), 호(號)는 둔촌(鈍村). 1260년(원종 1) 문과(文科)에 급제, 1269년(원종 10) 성절사 담(성절사 담(湛 : 세자)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元)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가 되었다. 재임중 방 보(方 甫), 계 년(桂 年) 등 일당이 진도 삼 별초(珍島三別秒)와 호응하여 반란(叛亂)을 일으켜 민심을 소란케 하자, 이를 평정(平定)하였는데 공을 세워 예부 낭중(禮部郎中)에 올랐다. 1275년(충렬왕 1) 이부 총랑(吏部總郞)을 역임하였으나 얼마 후 양주 부사(襄州府使)로 강등(降等)되었다. 1293년(충렬왕 19)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온 후추밀원 밀직학사(樞密院密直學士)․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예문관 제학(禮文館提學)을 거쳐 1300년(충렬왕 26) 보문각 대학사(寶文閣大學士)에 승직(昇職)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서예에 능했으며 특히 예서(隸書)에 뛰어났다.

김남물(金南物) 초명(初名)은 서경(瑞卿), 호(號)는 사재(師齋). 고려조(高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이르렀고, 재임중 목민관(牧民官)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만년(晩年)에는 안동에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을 학문에 진력했다.

김개물(金開物) 초명(初名)은 서정(瑞廷), 자(字)는 원구(元龜), 호(號)는 우계(愚溪)․고려(高麗) 때 여러번 과거(科擧)를 보았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세자(世子)의 총애(寵愛)를 받아 1299년(충렬 25) 사헌부 감찰사(司憲府監察史)에 천거되고, 이어 전부시승(典簿寺丞)에 전임되었다. 이때 내부령 강 융(姜 融)을 국문(鞠問)하였으나 후에 화(禍)를 당해 송가도(松加島)에 유배(流配), 이어 자연도(紫燕島)에 이배(移配)되었다가 풀려나 은거(隱居)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김 섬(金 銛) 고려조(高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 전교시 교감(典校寺校勘)을 거쳐 합문 지후(閤門祗侯)를 역임하였다.

김곤수(金昆壽) 호(號)는 인보당(仁保堂). 고려조(高麗朝)에 진사(進士)가 되어 남도 찰방(南道察訪)을 역임하였다.

김수해(金秀海) 고려말(高麗末)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나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김차문(金次文) 호(號)는 독당(篤堂).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문장(문장)에도 능하여「명농집(明農集)」을 저술했다.

김차무(金次武) 조선(朝鮮) 때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역임하였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김경보(金敬寶)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에 급제,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역임했다.

김 려(金 礪) 호(號)는 덕은(德隱). 조선조(朝鮮朝)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이르렀고, 손자(孫子) 태허(太虛)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功)을 세워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호조 참판(戶曹參 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김수형(金受亨) 조선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김희증(金希曾) 자(字)는 효칙(孝則). 조선(朝鮮)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학문(學問)에 심취, 시․부․율(詩․賦․律)에 능하였으며 주역(周易)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가 지은 도화우시(桃花雨時)가 전한다.

김대근(金大根) 조선(朝鮮) 때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역임하였다.

김구성(金九成) 조선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중추부사(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김국정(金國政)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김태허(金太虛) 1555 (명종 10) ~ 1620 (광해군 12) 자는 여실(汝實), 호(號)는 박연정(博淵亭), 시호는 양무(襄武). 희증(希曾)의 아들. 1580년(선조 13) 무과(武科)에 급제, 옥포 만호(玉浦萬戶)로 있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밀양부사(밀양부사)가 되어 남으로 쳐들어 오는 왜병을 울산․기장(機張) 수륙(水陸) 전투에서 8 차(八次)에 걸쳐 물리쳐 승리로 이끌었다. 그 공으로 봉정대부(奉正大夫)로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올랐고, 1599년(선조 32) 성주 목사(星州牧使)와 좌․우병사(左․右兵使)를 역임, 원종 1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어 그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도총부 도총관(都總府都摠管)에 이르렀다. 소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김태을(金太乙) 자(字)는 여상(汝橡), 호(號)는 구옹(矩翁). 남명(南冥) 조 식(曺 植)의 문인. 조선조(朝鮮朝)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세우지 않고 오로지 학문(學問)과 유학(儒學)에 심취 하였다. 특히 경전(經傳)에 능하여 영남 학자(學者)로 이름을 날렸다.

김명수(金明秀) 조선 때 수문장(守門將)을 거쳐 방어사(防禦使)를 지냈다.

김세순(金世純) 조선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

김 기(金 琦) 자(字)는 화향(和鄕), 호(號)는 호수(湖叟). 조선조(朝鮮朝)에 판관(判官)으로 재임시 왜국(倭寇)가 침입하자 항전하였으나 순절(殉節)하였다. 후에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에 증직(贈職)되었다.

김우정(金禹鼎) 조선조에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김수겸(金守謙) 자(字)는 국부(國夫). 무과(武科)에 급제, 통정대부(通政大夫)․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중추부사(中樞府使) 겸 첨지오위대장․안동 영장(安東營將)을 지내고임진왜란(壬辰倭亂)때 공이 있어 선무원종 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김수인(金守認) 자(字)는 군신(軍愼), 호(號)는 구봉(九峯). 1603년(선조 36)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태학(太學)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태학생들의 추천으로 장의(掌醫)가 되어어며 학덕(學德)을 겸비항 명성(明聲)과 신망(信望)이 높았다.

김명호(金命鎬) 조선 때 중직대부(中直大夫)에 이르렀다.

김양호(金楊鎬)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김부호(金富鎬) 조선조(朝鮮朝)에 전력부위(展力副慰)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를 역임하였다.

김지호(金之鎬) 조선에서 선무랑(宣務郞)에 이르렀다.

김지흠(金之欽) 자(字)는 자경(子敬), 호(號)는 명파(明坡). 조선조(朝鮮朝)에 동생 지건(之建)이 명천 부사(明川府使)를 지내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김 몽(金 夢) 호(號)는 첨정(僉正). 조선조(朝鮮朝)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거쳐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正大夫)로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증직(贈職)되었다.

김지건(金之鍵) 자(字)는 자강(子剛). 1654년(효종 5)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통우후(統虞侯)를 지내고, 백익도수군첨절제사(白翊島水軍僉節制使)․진주영장(晋州營將)을 역임,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명천 부사(明川府使)를 지냈다.

김득남(金得南)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시간(金時侃) 조선에서 사복시정(司僕市正)을 역임하였다.

김여구(金汝球)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일르렀다.

김 낙(金 洛) 조선 때 선무랑(宣務郞)에 이르렀다.

김 기(金 淇) 자(字)는 의원(義源). 1671년(현종 12) 무과(武科)에 급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거제 현령(巨濟縣令)․진도 군수(珍島郡守)․남원 영장(南原榮將)을 지냈다.

김시립(金時立) 자(字)는 극화(極和). 조선조(朝鮮朝)에 무과(武科)에 급제,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연일현감(延日縣監)을 역임하였다.

김종이(金宗履) 자(字)는 익지(益之), 호(號)는 남강(南嵹). 1773년(영조 49) 무과(武科)에 급제, 전옥서 주부(典獄署主簿)를 거쳐 여러 관직을 지내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하였다.

김종만(金宗萬) 자(字)는 일보(鎰甫). 조선조(朝鮮朝)에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종일(金宗鎰)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익택(金翊澤) 조선(朝鮮) 때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

김성옥(金成玉)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상의(金尙義) 조선에서 전위사 직장(典渭司直長)을 지냈다.

김상원(金尙元) 조선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생려(金生麗) 조선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익겸(金益兼) 조선 때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역임.

김하정(金夏正)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하정(金夏鼎) 조선(朝鮮) 때 호군(護軍)을 역임.

김시립(金時立) 조선 때 연일 현감(延日縣監)을 역임하였다.

김우세(金遇世)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김계휘(金繼揮) 조선 때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지냈다.

김보한(金輔漢) 조선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천극(金天極)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김천숙(金天淑)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종만(金宗萬)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종리(金宗履) 조선 때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하였다.

김종호(金宗浩)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김규화(金奎華)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어권(金漁權)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재기(金在淇) 조선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한방(金漢邦)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난규(金蘭奎) 자(字)는 영수(英秀), 호(護)는 매각(梅覺), 1833년(순조 33)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내고 용양위부호군(龍驤 衛副護軍)․홍주 영장(洪州營將)에 이르렀다.

김도윤(金道閏) 조선(朝鮮) 때 선조(先祖)의 음몽(陰蒙)을 입어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충무위 부사용(忠武衛副司勇)을 거쳐 1885년(고종 22)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를 역임하였다.

김치민(金致敏) 자(字)는 계경(季卿), 조선조(朝鮮朝)에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용양위 부호군(龍讓衛副護軍)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김규명(金奎明) 자(字)는 현우(賢佑), 조선(朝鮮)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양주진관 영평병마절제사(楊州鎭管永平兵馬節制使)를 역임 하였다.

김명규(金明奎) 조선(朝鮮) 때 선무랑(宣務郞)에 올랐다.

김용륜(金鏞崙)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역임.

김용재(金鏞載)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병익(金秉翼) 조선 때 내시부 상선(內侍府尙膳)을 역임하였다.

김 전(金 鈿) 조선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김복영(金福永) 조선 때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

김병영(金炳永) 조선(朝鮮) 때 도정(都正)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