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공주 김씨(公州金氏) 오산군(鰲山君) 김지대(金之岱 : 청도 김씨의 시조)의 9세손

작성일 : 2017-11-09 17:02 수정일 : 2017-11-10 17:03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공주(公州)는 충청남도 동부(東部)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百濟)의 옛 도성(都城)이었다.

백제는 서기 475(문주왕 1)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이 곳에 수도를 옮기고 웅진(熊津)으로 이름하여 538(성왕 16)에 부여(扶餘)로 천도(遷都)하기까지 약 60여 년간 도읍으로 정했었다.

그후 서기 670(신라 문무왕 10) 신라(新羅)에 속했으며 신문왕(神文王 : 31대 왕, 재위기간 : 681692) 때 웅천주(熊川州)로 고쳤다가, 940(고려 태조 23) 공주(公州)로 개칭하였다.

공주 김씨(公州金氏)의 시조(始祖) 김의손(金義孫)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 오산군(鰲山君) 김지대(金之岱 : 청도 김씨의 시조)9세손이다.

그는 조선 세종(世宗)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돈령부사(敦寧府事)에 오른 점()의 아들 3형제중 둘째로 어려서 사마시(司馬試 : 과거제도의 하나로 진사와 생원을 뽑는 소과)에 합격하고 참판(參判)을 거쳐 공주백(公州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공주(公州)로 삼아 청도 김씨(淸道金氏)에서 분적(分籍)하였는데, 시조(始祖) 의손(義孫)의 아들중 여의(麗義)․일동(逸東)․응동(應東)은 청도 김씨를 계승하였고, ()공주파(公州派), ()평양파(平壤派), 곽산파(郭山派)로 각각 세계(世系)를 이었다.

역사상 두드러진 인물을 살펴보면 만의(萬義)의 아들 학기(學起)가 조선 세조(世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낸 후 1478(성종 9) 서거정(徐居正)․최숙정(崔淑精) 등과 함께 「동문선(東文選) : 신라에서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시문을 모은 책)」 편찬에 참여하고, 집의(執義)를 거쳐 대제학(大提學 : 홍문․예문관의 정2품벼슬)에 올라 크게 명성을 날렸으며, 그의 아우 학익(學益)은 현감(縣監)을 지냈다.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태좌(台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천경(天慶)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응참(應參)․응철(應哲) 등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능한산성(綾漢山城)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헌종(憲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추증되었다.

그외 덕량(德良)1546(명종 1) 문과(文科)에급제하고 감찰(監察)과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부호군(副護軍) 언충(彦沖)은 군자감(軍資監) 계로(繼老), 부총관(副摠管) 덕택(德澤), 감찰(監察) 변적(卞赤)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주 김씨(公州金氏)는 남한에 총 2,401가구, 7,5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김 구(金 龜)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김해충(金海忠) 조선 때 도정(都正)을 지냈다.

김득귀(金得貴) 조선에서 중랑장(中郞將)을 역임.

김학기(金學起) ()는 문백(文伯), ()는 노암(蘆菴). 1406(세조 6)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김 은(金 銀) 1507(중종 2)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삼등공신(定難三等功臣)에 책록되었다.

김성경(金成卿) 1543(중종 38) 식년문과에 급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필좌(金必佐)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필흥(金必興) ()는 백통(伯通).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수오(金秀五) 자는 여준(汝俊).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태좌(金台佐) 자는 백섭(伯燮), 호는 수박자(守朴子). 계공랑(啓功郞)으로서 1588(선조 2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우윤(右尹) 등을 역임하였다.

김 용(金 龍) 1618(광해군 10) 명청(明淸) 전쟁 때 좌익장(左翼將)으로서 우익장(右翼將)인 종질(從姪) 무의(務義)와 함께 심양에 출전, 우미채(牛尾寨)에서 전사했다. 곽산(郭山)의 오열사(五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김천경(金天慶)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도총관(都摠官)으로서 창의(倡義)하여 능한산성(綾漢山城)에서 순절하였다. 후에 통훈대부(通訓大夫)․예빈시정(禮賓寺正)에 추증되었다.

김덕로(金德老) 자는 미수(眉叟). 1782(정조 6)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역임했다.

김 일(金 鎰)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역임

김응오(金應五) 조선 때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김한우(金漢愚) 조선에서 참의(參議)를 역임.

김원준(金遠駿) 조선(朝鮮)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

김중구(金重九) 자는 형삼(亨三), 호는 낙천재(樂天齋). 충익장(忠翊將)을 지냈다.

김성련(金成璉) 조선 때 도정(都正)을 역임하였다.

김희린(金禧麟) 자는 성보(成甫). 1782(정조 6) 문과에 급제하여 판교(判校)를 역임하였다

김상인(金尙仁)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상진(金尙珍) 자는 백향(白鄕), 호는 석재(石齋).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김익명(金翊明) 조선 때 대호군(大護軍)을 역임.

김두중(金斗重)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김문국(金文國) 자는 명여(明汝), 호군(護軍)을 역임하였다.

김성척(金聖倜) 자는 중언(仲彦). 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

김종규(金鍾珪) 자는 자율(子律). 충의장(忠義將)을 역임.

김남엽(金南燁)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

김덕량(金德良) 자는 일지(一之), 1546(명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감찰(監察)․군수(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김학익(金學益)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

김언충(金彦忠) 자는 국보(國甫).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계로(金繼老) ()는 성수(聖叟). 군자감(軍資監)을 지냈다.

김덕택(金德澤) 자는 자윤(子允).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였다.

김변적(金卞赤) 조선에서 감찰(監察)을 역임.

김택룡(金澤龍) ()는 운로(雲路).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김시윤(金時尹) 조선 때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김석남(金석南) 조선 때 찰방(察訪)을 역임.

김회로(金誨魯) 조선에서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김문혁(金文赫) 조선 때 사과(司果)를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