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경주김씨시조(慶州金氏),김알지(金閼智),경주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6:11 수정일 : 2018-03-10 21:11

경주김씨의 연원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신라(新羅) 56() 경순대왕(敬順大王)이 고려(高麗)에 손국(遜國)하자 옛 수도(首都)인 금성(金城)을 경주(慶州)라 개칭(改稱)하였다. 그런데 경주김씨(慶州金氏)의 기원(起源)은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를 시조(始祖)로 한다. 김알지(金閼智)는 서기(西紀)65년 신라(新羅) 석탈해왕(昔脫解王) 9년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의 나무가지에 걸려있던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해서 성()을 김()으로 하였다.

대보공(大輔公)의 칠세손(七世孫) 미추(味鄒)가 석조분왕(昔助賁王)의 여() 광명부인(光明夫人)을 취()하여 사위가 되었는데 석첨해왕(昔沾解王)이 후사(後嗣)가 없이 승하(昇遐)하시니, 석첨해왕(昔沾解王)의 뒤를 이어 신라(新羅) 13대 왕으로 오르면서부터 신라(新羅) 왕성(王姓)이 되었다.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신라(新羅) 56왕중에서 38(재위기간587)을 내어 삼한(三韓)의 대표적(代表的)인 성씨(姓氏)를 이룰 수 있었다. 신라(新羅) 마지막 경순대왕(敬順大王)935년 군신회의(君臣會議)에서 손국(遜國)에 대한 찬반(贊反)이 엇갈리며 태자(太子) ()의 불가론(不可論)이 제기(提起)되기도 했지만 결과(結果)는 현실적(現實的)인 자구(自救)의 방법(方法)을 택()하였다.

태자(太子)는 손국후(遜國後) 맹장군(孟將軍),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 덕주공주(德周公主), 등 일만여명(一萬餘名)은 신라(新羅) 중흥운동(中興運動)의 장차(將次) 거점(據點)이 될 설악산(雪嶽山)으로 들어갔다.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아들이 아홉인데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모두 본관(本貫)을 경주(慶州)로 하였다. 태자(太子) ()의 둘째아들 순웅(順雄)은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로 굉()의 둘째 우발(雨發)은 안노백파(安老伯派), 셋째 명종(鳴鐘)은 영분공파(永芬公派), 넷째 은열(殷說)은 대안군파(大安君派)로 각각(各各) 경주김씨(慶州金氏) 대파(大派)를 이룩하였다.

 

본관지(本貫地) 연혁(沿革)

신라(新羅)의 옛 수도(首都)인 왕경(王京)을 대경(大京) 또는 금성(金城)이라 불렀다. 서나벌(徐那伐), 즉 서라벌(徐羅伐)이라 했는데 이것이 변()하여 오늘날 수도(首都)를 서울로 부르게된 연유(緣由)이다. 935년 고려(高麗)에 손국(遜國)하자 마지막 남은 신라(新羅)땅의 이름을 경주(慶州)로 고치고 경순대왕(敬順大王) ()를 경주사심관(慶州事審官)으로 삼았다.

940年 고려태조(高麗太祖) 23년에 안동(安東) 대도호부(大都護府), 987년 성종(成宗) 6년 동경유수부(東京留守府)로 고쳐 영동도(嶺東道)에 예속(隸屬)시켰고, 현종(顯宗) 때에는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하였으며 신라복귀반란(新羅復歸叛亂)이 일어나자 주(), (), (), ()을 빼았아 안동(安東), 상주(尙州)에 나누어 예속(隸屬)시키기도 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때 경주(慶州)라는 옛 이름을 다시 썼다.

 

씨족(氏族)의 개요(槪要)

우리나라의 김씨(金氏)는 크게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계(首露王系)의 김씨(金氏)를 제외(除外)하고는 모두 김알지(金閼智)의 후손(後孫)이다. 신라(新羅)에서 김씨왕계(金氏王系)가 내려오면서 김주원(金周元)의 후손(後孫)인 강능김씨(江陵金氏)처럼 도중(途中)에 인물(人物)을 분관조(分貫祖)로 한 성씨(姓氏)도 있으나, 대개(大槪)는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아들에서부터 세계(世系)가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병란(兵亂)과 사화(士禍), 외적(外賊)의 침입(侵入)등의 수난(受難)을 겪는 동안 문헌(文獻)과 유적(遺蹟), 유물(遺物)이 망실(亡失) 훼손(毁損)되어 분명(分明)한 계대(系代)를 찾는 일에 주력(注力)하였으나 1784년 계림군후손(雞林君後孫) 김사목(金思穆)과 안동인(安東人) 김익노(金翼老)등이 경순대왕(敬順大王)의 넷째아들 대안군 은열(大安君 殷說)의 묘비문(墓碑文)을 발견(發見)함으로서 왕자(王子)들의 서차(序次)를 확인(確認)하여 이후(以後) 문헌비고(文獻備考)등 각종(各種) 간행물(刊行物)에 기록(記錄)되었다

 

역대인물-경주김씨조상인물

김알지(金閼智) 서기(西紀)65?

봉위(封位): 대보공(大輔公) 서기전(西紀前) 573월 일 육부촌장(六部村長)인 이알평(李謁平), 최소벌도리(崔蘇伐都利), 손구례마(孫俱禮馬), 정지백호(鄭智伯虎), 배지타(裵祗陀), 설호진(薛虎珍), 등이 모여 13세 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추대(推戴)하고 서라벌(徐羅伐).을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백선장(白善長), 고령시(高靈是), 조공흠(趙公欽), 이두창(李頭昌), 임의신(任儀信), 지충강(池忠江), 김관령(金寬齡), 조익관(趙益寬), 양지백(梁之伯), 조대정(趙大正), 추자평(秋子平), 정선엽(丁善燁), 임동방(林彤芳), 강이태(康二太), 정지석(鄭之碩), 홍식(洪息), 양선진(梁善秦), 신초시(申初是), 한영구(韓寧龜), 이형익(李衡翊), 등이 차례로 와서 신라건국(新羅建國)을 도운바 있다.

김알지공(金閼智公)은 서기65(석탈해왕(昔脫解王9) 금성서편(金城西便) 시림(始林)에서 강임(降臨)하셨으며 탈해왕(脫解王)이 양육(養育)하였다.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이라 하였고 경주김씨(慶州金氏) 시조(始祖) 대보공김알지(大輔公金閼智)이다. 성장(成長)함에 따라 총명(聰明)하고 지략(智略)이 뛰어나 알지(閼智)라 이름하였고 시림(始林)도 닭이 울었다 하여 계림(鷄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손(後孫)들은 추존(追尊) 세조대왕(世祖大王)이라 하였다. 알지(閼智)의 아들은 세한(勢漢)이며 그 뒤의 계보(系譜)는 아도(阿道), 수류(首留), 욱보(郁甫), 구도(仇道)로 이어지며 구도(仇道)의 아들은 김씨(金氏)로서는 처음으로 왕위(王位)에 오른 미추니사금(味鄒尼師今)이다. 이는 알지(閼智)7세손(世孫)이며 신라(新羅)13대왕(代王)이시다. 왕비(王妃)는 석강조(昔康造)의 딸로 마정부인(摩貞夫人)이다.

미추왕(味鄒王) 在位 261283

김씨(金氏)로서는 초대왕(初代王)이고 신라(新羅) 13()이다. ()는 구도(仇道)이고 모()는 박갈문왕(朴葛文王) 이칠(伊柒)의 딸이다. 왕비(王妃)는 석조분왕(昔助賁王)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이며 석첨해왕(昔沾解王)이 아들이 없어 인덕(仁德)이 높은 미추(味鄒)가 후계(後繼)로 이은 것이다. 在位(261283)중 두차례의 백제(百濟)의 침공(侵攻)을 물리치고 백성(百姓)들이 농사(農事)를 잘 짓도록 하였다.

내물왕(奈勿王) 재위(在位)(356402)

김씨계(金氏系) 2대 왕으로 신라(新羅) 17대왕이다. ()는 각간(角干) 말구(末仇)이고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손()이며 모()는 휴례부인(休禮夫人)이고 비()는 미추왕녀(味鄒王女) 예희부인(禮希夫人)이다. () 말구(末仇)는 미추(味鄒)의 아우로 석흘해왕(昔訖解王)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자 뒤를 이었다. 재위 47년간(年間) ()에서는 왜()가 북()에서는 고구려(高句麗), 말갈등(靺鞨等)이 침공(侵攻)하였으나 잘 물리치고 국정(國政)을 바로 잡았다. ()의 현명(賢明)한 판단(判斷)으로 백제(百濟)를 굴복(屈服)케 했는데 백제(百濟)의 독산성주(禿山城主)300명을 이끌고 투항(投降)했다.

김무알(金武謁)

신라(新羅) 눌지왕(訥祗王)때 고구려(高句麗)에 볼모로 간 복호(卜好)의 보좌관(輔佐官). 신라는 412,실성왕(實聖王11) 고구려(高句麗)의 요청(要請)을 받아들여 내물왕(奈勿王)의 아들 복호를 볼모로 보냈는데 눌지왕(訥祗王)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복호의 환국(還國)을 간곡(懇曲)히 바랐다. 418,(눌지왕2) 복호는 박제상(朴堤上)과 환국(還國) 했는데 당시 보좌역(補佐役)이 김무알(金武謁)이다.

지증왕(智證王) 在位(500513)

신라(新羅) 22대이고 김씨계(金氏系) 7대 왕이다. ()는 지대로(智大路)이고 내물왕(奈勿王)의 증손(曾孫)이며 갈문왕(葛文王) 습보(習寶)의 아들이다. 그의 모()는 오생부인(烏生夫人)으로 눌지왕(訥祗王)의 딸이며 비()는 이찬(伊湌) 박등흔(朴登欣)의 딸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재위 15년간 굵직한 치적(治積)이 있었는데, 순장(殉葬)을 금() 하였고 군주(郡主)에게 명()하여 소로 밭을 갈도록 하였다. 재위 4년에 국호(國號)를 신라(新羅), 지금까지의 왕의 칭호(稱號)인 마립간(麻立干)에서 왕으로 호칭(呼稱)하였으며 처음으로 시법(諡法)을 시행(施行)하였다.

법흥왕(法興王) 재위(514539)

()는 김원종(金原宗) 출가후(出家後) 법명(法名)은 법공(法空) 지증왕자(智證王子) ()는 연제부인(延帝夫人) ()는 보도부인박씨(保刀夫人朴氏)이다. 517년 병부(兵部)를 설치(設置)했으며 520년 처음으로 율령(律令)을 공포(公布)하여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정()하는 등 국가(國家) 체제확립(體制確立)에 힘을 기울였고 내사사인(內史舍人) 이차돈(異次頓:朴訖解王曾孫)과 함께 불교(佛敎)를 국교(國敎)로 하고자 하나 반대(反對)가 있어 순교(殉敎)하였으므로 예언(豫言)대로 이적(異蹟)을 보고 신하(臣下)들이 마음을 굽혀 527년 불교(佛敎)를 공인(公認)하게 되었다. 자신도 왕위(王位)를 버리고 스님이 되어 흥륜사(興輪寺)에 머물렀가. 왕비(王妃)도 스님이 되어 묘법(妙法)이라 이름하고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진흥왕(眞興王) 재위(540575)

신라(新羅) 24대 왕이고 김씨계(金氏系) 9대 왕이다. ()는 삼맥종(彡麥宗), 법흥왕(法興王)이 아우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모는 법흥왕의 딸이다. ()는 박씨(朴氏)로 사도부인(思道夫人)으로 7()에 왕위(王位)에 오르고 왕태후(王太后) (법흥왕비(法興王妃)가 섭정(攝政)하였다. 545년 대아찬(大阿湌) 거칠부(居柒夫) 등을 명하여 국사(國史)를 꾸미게 하였다. 11년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가 교전(交戰)이 심한 틈을 타서 두 성()을 쳐서 지키게 하고 백제의 침공(侵攻)을 맞아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555(16) 북한산(北漢山)에 순행(巡行) 강역(彊域)을 확정(確定) 하였다. 576(37) 화랑제(花郞制)를 실시 국위(國威) 향상(向上)에 기틀을 잡았다.

김무력(金武力)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때의 장군(將軍)으로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이고 금관가야(金官伽倻)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셋째아들이다. 532년 가야(伽倻)가 신라에 합병(合倂)되자 부왕(父王)과 왕모(王母) 및 큰형 노종(奴宗), 둘째형 무덕(武德)등과 함께 신라에 투항(投降)했다. 그는 진흥왕(眞興王)이 고구려(高句麗) 영역(領域)인 한강유역(漢江流域) 및 백제(百濟)의 점령지(占領地)를 탈환(奪還)하여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한 신주(新州)를 설치(設置)할 때 공()이 커 아찬(阿湌)의 벼슬로 이곳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그후 백제(百濟)의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沃川)을 공격(攻擊)했을 때 주병(州兵)을 이끌고 교전(交戰)하여 성왕(聖王)을 전사(戰死)케 하고 백제의 좌평(佐平) 4명과 사졸(士卒) 296백명을 전몰(戰歿)시키는 공()을 세워 그 뒤 관등(官等)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아들 서현(舒玄)은 진평왕(眞平王)때 대량주(大梁州) 도독(都督)을 지냈으며 손녀인 문희(文姬)는 태종무열왕비(太宗武烈王妃)가 되었으며 손자 김유신(金庾信)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삼국통일(三國統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원광(金圓光) 555,(眞興王16)681,(神文王1)

내물왕(奈勿王) 7세손(世孫) 신라(新羅) 중기(中期)의 중국(中國) 구법승(求法僧) 579(眞平王1) 25세에 출가(出家)하여 30세에 경주안강(慶州安康)의 삼기(三岐)에 들어가 수도(修道)하였다. 당나라에 가서〈열반경(涅槃經)〉을 비롯하여 여러 경전(經典)을 배우고 600,(眞平王22) 귀국(歸國)하였다. 이후 [여래장경(如來藏經)사기], [대방등여래장경소]등을 지어 불교(佛敎)의 여러 새로운 지식(知識)을 신라에 도입(導入)했다. 청도 가실사에 있을 때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찾아와 교훈(敎訓)을 청하므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주었다.

세속오계(世俗五戒)신라(新羅) 화랑도(花郞徒)의 중심이념(中心理念)이 되었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유신(交友有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김사다함(金斯多含)

진흥왕(眞興王)때의 화랑(花郞)으로 급찬(級湌) 구리지:의충(仇梨知:義忠)의 아들이다. 진골출신(眞骨出身)으로 풍채(風采)가 청수(淸秀)하고 사기(士氣)가 방정(方正)하여 화랑(花郞)으로 추대(推戴)되어 1000여명의 화랑(花郞)을 거느렸다. 대가야(大伽倻)를 정벌(征伐)할 때 16세의 나이로 기병(騎兵) 5천을 거느리고 싸워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 공()으로 받은 300명의 노예(奴隸)를 자유민(自由民)으로 놓아주고 전지(田地)를 받았으나 사양(辭讓)하고 불모지(不毛地)를 받았다. 어렸을 때의 친구(親舊) 무관랑(武官郞)의 병사 소식(消息)을 듣고 17세로 졸()했다.

김대문(金大問)

삼국사기(三國史記:金富軾著)를 편찬(編纂)할 때 귀중(貴重)한 자료(資料)가 되었다는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 원본(原本)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89년 발견(發見)된 발췌화랑세기(拔萃花郞世紀), 28세 풍월주 오기공조(吳起公條)에 보면 아버지는 예원공(禮元公), 어머니는 우약공주(雨若公主)로 내물왕(奈勿王)10세손(世孫)이다. 화랑세기(花郞世紀)는 풍월주(風月主) 1(540)부터 마지막(681) 32세 풍월주신공(風月主信功)까지 기록(紀錄)하고 있다. 704(聖德王4)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을 지낸 기록(記錄)이 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6)

신라(新羅) 27대 왕이고 김씨계(金氏系) 12대왕이다. ()는 덕만(德曼)이고 진평왕(眞平王)의 장녀(長女)이다. ()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金氏)이다. 덕만(德曼)은 너그럽고 총명(聰明)하였으며 부왕(父王)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어 나라사람이 덕만(德曼)을 세워 성조황고(聖祖皇姑)라 호()를 올렸다.

내치(內治) 외교(外交)에 힘썼으며 왕의 자제(子弟)를 당()에 보내어 국학(國學)을 공부(工夫)하도록 했다. 외교(外交)와 국방(國防)에 주력(主力)하여 놀라운 치적(治績)을 올렸다. 왕이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은 비담(毗曇)이 배신(背信)하여 반란을 일으켜 병든때 충격을 주어 서거(逝去)하였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654660)

신라(新羅) 29대 왕이고 김씨계(金氏系) 14대 왕이다. ()는 춘추(春秋)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인 이찬(伊湌)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는 진평왕(眞平王)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는 각간(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인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왕의 용자(容姿)가 준수(俊秀)하였으니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섬기며 벼슬은 이찬에 이르렀다. 군신(君臣)들의 추대(推戴)에 의해 654년 왕위(王位)에 올랐다.

656년 말갈(靺鞨),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의 침공을 받아 위태했으나 당()의 원군(援軍)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일단 후퇴(後退)했다. 이찬(伊湌) 김유신(金庾信)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으며,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당군(唐軍)과 법민태자(法敏太子), 김유신장군(金庾信將軍)5만 군사(軍士)로 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이 이끄는 군사(軍士)를 무너뜨리자 백제군(百濟軍)이 항복(降伏)했다. 백제는 부흥(復興)을 꿈꾸는 무리들이 신라를 괴롭혔으나 백제는 완전(完全)히 괴멸(壞滅)되었다

문무왕(文武王) 재위(在位)(661680)

신라(新羅) 30대 왕이며 김씨계(金氏系) 15대 왕이다. ()는 법민(法敏),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장자(長子), ()는 김씨(金氏) 문명왕후(文明王后)로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계녀(季女)이며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다. ()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 파진찬(波珍湌) 선품(善品)의 딸이다. 법민은 외모(外貌)가 출중(出衆)하고 총명(聰明)하며 지략(智略)이 많은이로 진덕왕(眞德王)때 당나라에 갔다가 당 고종(高宗)으로부터 대부경(大府卿)의 벼슬을 받았다. 665(5)에 백제(百濟) 부흥군(復興軍)을 완전(完全)히 섬멸(殲滅)하고 당과 연합(聯合)하여 고구려(高句麗)를 평정(平定)했다. 당은 점령지(占領地)를 완전(完全)히 지배(支配)하려 하였으나 강력(强力)하게 밀어붙여 당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平壤)를 요동(遼東)으로 옮겼다. 676,(16)에 통일성업(統一聖業)을 완수(完遂)했다.

경덕왕(景德王) 재위(742764)

신라(新羅) 35대이고 김씨계(金氏系) 20대 왕이다. ()는 헌영(憲英)이고 효성왕(孝成王)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효성왕(孝成王)이 아들이 없으므로 태자(太子)로 삼았던 헌영(憲英)이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하였다. ()는 이찬(伊湌) 순정(順貞)의 딸이다. 왕은 즉위(卽位) 초부터 왕권(王權) 강화(强化)를 위해 관제(官制)를 정비(整備)하고 과감(果敢)히 개혁(改革)을 시도(試圖) 했다. 전문(專門) 학자(學者)와 관료(官僚)를 육성(育成)하는 등 유교정치(儒敎政治) 구현(具顯)에 토대(土臺)를 마련했다. 이 정책(政策)에 반기(反旗)를 든 상대등(上大等) 김은인(金恩仁)은 천재지변(天災地變)의 빈번(頻繁)함을 빌미로 극렬반대(極烈反對)했다. 757(16) 지방행정조직(地方行政組織)인 구주오소경(九州五小京)과 중앙관제(中央官制)를 중국식(中國式) 한자(漢字)로 개정(改正)하는 등 제도개혁(制度改革)을 단행(斷行)했다.

원성왕(元聖王) 재위(785798)

신라(新羅) 38대이고 김씨계(金氏系) 23대 왕이다. ()는 경신(敬信)이고 내물왕(奈勿王)12세손(世孫)으로 아버지 효양(孝讓), 어머니는 박씨계오부인(朴氏繼烏夫人)이다. ()는 각간(角干) 김신술(金神述)의 딸이다. 왕위(王位)에 오를 때 일화(逸話)가 전한다 재위(在位) 14년간(年間) 계속(繼續)되는 흉년(凶年)과 어느 해는 매뚜기떼의 창궐(猖獗)에 이어 도적(盜賊)떼가 극성(極盛)을 부리자 왕은 당황했다. 이런 와중(渦中)에 왕 7년에는 시중(侍中)을 지낸 이찬(伊湌) 제공(悌恭)이 역모(逆謀)를 꾀했으나 주역(主役)을 잡아 처형(處刑)으로 끝낼수 있었다.

끊임없는 천재(天災)와 어려운 국정(國政)에도 과거제(科擧制)의 시초(始初)라 할 수 있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정하여 많은 인재(人材)를 양성(養成)하여 등용(登用)할 수 있었다.

김균정(金均貞)

원성왕(元聖王)의 손자(孫子)이며 신무왕(神武王)의 아버지다. 흥덕왕(興德王)의 후사(後嗣)가 없자 왕위계승(王位繼承)싸움에 밀려 살해(殺害)되었고 아들 우징(祐徵)이 왕위(王位:神武王)에 오르자 성덕대왕(聖德大王)으로 추존(追尊)되었다..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7個月)

신라(新羅) 45대 왕으로 김씨(金氏) 30대 왕이다. ()는 우징(祐徵), 원성왕(元聖王)의 손()인 상대등(上大等) 김균정(金均貞)의 아들이다. 희강왕(僖康王)의 종제(從弟)였으며 예징(禮徵)등이 궁궐(宮闕)을 점유(占有)하자 예를 갖춰 왕을 맞아 즉위(卽位)케 하였다. 재위839년 윤정월(閏正月)에 즉위(卽位)하고 7월에 훙()하자 왕이 종기(腫氣)로 사망(死亡)했다고 전하고 있지만 이미 즉위(卽位) 이전(以前)에 득병(得病)이 있었다고 하였다. 당시(當時)의 사신(史臣)들이 왕위쟁탈(王位爭奪)의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하여 후세(後世)에 알리는 것도 춘추(春秋)의 뜻이라고 했다.

문성왕(文聖王) 在位(839856)

신라(新羅) 46대이고 김씨계(金氏系) 31대 왕이다. ()는 경응(慶膺)으로 신무왕(神武王)의 태자(太子), ()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 즉위(卽位)부터 관심(關心)을 갖은 것은 청해진(淸海鎭)의 일로서 조서(詔書)와 함께 장보고(張保皐)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명했다. 그런데 즉위전(卽位前)에 장보고(張保皐)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을 약속(約束)을 했으나 제신(諸臣)들이 들어주지 않자 장래(將來) 불안(不安)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방(豫防)하고자 재위8(846)째 되는 해에 염장(閻長)을 보내어 죽였다. 그밖에 재위중(在位中) 모반(謀叛)하는 사건(事件)이 수차 있었고 천재(天災)가 있는 등 나라가 평안(平安)하지 못하였으며 대중국,(對中國,)와의 교류(交流)도 미약(微弱)해졌다. 19년에 병환(病患)으로 편하지 못하자 유조(遺詔)를 밝힌 후 7일만에 훙()하였다.

인경(仁慶)

문성왕(文聖王)의 증손(曾孫) 민공(敏恭)의 둘째 아들.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조부(祖父)이시다. 형인 실홍(實虹)의 벼슬은 각간(角干)으로 추존(追尊) 의전왕(懿典王)이며, 화랑좌삼부(花郞左三部)의 좌화랑(左花郞)이었다. 인경(仁慶)은 이찬(伊湌)으로 신덕왕(神德王)때 각간(角干)을 지냈으며 추존(追尊) 의흥왕(懿興王)이다. 배위(配位)는 석씨(昔氏)이다

효종(孝宗)

서발한(舒發翰) 인경(仁慶)의 아들로 어릴때의 이름은 화달(化達)이다.

진골좌대화랑(眞骨左大花郞)으로 도성금성(都城金城)에서 천여명을 거느렸다. 국운(國運)이 쇠퇴(衰退)함을 안타까워하며 후백제견훤(後百濟甄萱)이 신라(新羅)의 서부(西部) 각 진지(陣地)를 압박(壓迫)하자 방어군(防禦軍)으로 나가 큰 전과(戰果)를 올리기도 하였다.

902년 효공왕(孝恭王)이 대아찬(大阿湌) 효종(孝宗)을 시중(侍中)으로 삼았으며 916년 견훤(甄萱)이 대야성(합천)을 추허조(鄒許祖) 장군(將軍)을 앞세워 공격(攻擊)하자 당시(當時) 대야성주(大耶城主) 효종장군(孝宗將軍)은 이를 물리쳐 기세(氣勢)를 올리기도 했다. 아들 부()가 왕이 되자 신흥대왕(新興大王)으로 추존(追尊)되었다.

경순대왕(敬順大王) (882978) 재위(927935)

신라(新羅) 56대 왕이고 김씨계(金氏系) 38대 왕이다. ()는 부()이고 문성왕(文聖王)6세손(世孫)이다.

이찬(伊湌) 효종(孝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헌강왕비(憲康王妃) 계아태후(桂我太后), ()는 박파사왕(朴婆娑王)25세 광우녀(光佑女) 죽방부인(竹房夫人)이다. 후비(后妃)는 왕건비(王建妃) 신명순성왕후유씨녀(神明順成王后劉氏女) 낙낭공주(樂浪公主), 별빈(別嬪) 순흥안씨(順興安氏), 3()는 왕건(王建) 25() 성무부인평주박씨녀(成茂夫人平州朴氏女). 대왕(大王)882년 헌강왕(憲康王) 8년에 강생(降生)하고 첫 혼인(婚姻)18세 때인 899, 내해왕 21세손 송희부인 석씨와 혼인(婚姻)하고 생 5남이 있음이 최근(最近) 자료(資料)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아버지인 효종(孝宗)은 지덕(智德)을 겸비(兼備)한 장군(將軍)으로서 출정(出征)하여 백제(百濟)의 공격(攻擊)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927년 금성(金城)이 견훤(甄萱)의 기습(奇襲)에 의하여 함락(陷落)되고 경애왕(景哀王)이 시해(弑害)된 후 대왕(大王)이 계위(繼位)하였다. 931223일 왕건(王建)50여 기병(騎兵)을 왕도기내(王都畿內)에 이르러 장군(將軍) 선필(宣弼)을 보내 안부를 물으니 당제상국유렴(堂弟相國裕廉)등이 성() 밖에 나가 맞아들였으며 93일간 머무른 후 526일 송도(松都)로 귀환(歸還)했다. 왕건(王建)이 왕도(王都) 금성(金城)에 머무는 동안 경순대왕(敬順大王)과의 사이에는 신라(新羅)의 장래문제(將來問題)에 대하여 제신(諸臣)과 협의(協議)한 후 양국(讓國)에 대한 협의(協議)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왕건(王建)이 상국(相國) 김유렴(金裕廉)등 일행(一行)이 동반북행(同伴北行) 양국(讓國)에 대한 구체적(具體的) 절차(節次)를 마련한 것 같다.

935년 경순대왕(敬順大王)은 나라를 고려(高麗)에 넘길 것을 군신(羣臣)들에게 말하자 신하(臣下)들의 의견(意見)이 일치(一致)하지 않자 대왕(大王)은 나라의 형세(形勢)가 강함도 없고 약함도 없는데 차마 죄없는 백성(百姓)을 참혹(慘酷)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하고 시랑김봉휴(侍郞金封休)로 하여금 왕건(王建)에게 보내 양국(讓國)할 뜻을 전하였다.

손국후(遜國後) 왕건태조(王建太祖)의 송도귀부(松都歸附)의 뜻을 받아들여 113일 백료사서(百僚士庶)들이 왕경(王京)을 출발(出發) 12일 송도(松都)에 도착(到着)했으며 왕건(王建)과 재신(宰臣)들의 공대(恭待)를 받았고 유화궁(柳花宮)에 예우(禮遇)를 극진(極盡)히 하였다.

태자(太子) ()과 분() 그리고 맹장군(孟將軍)등 기만(幾萬)의 무리는 충청(忠淸), 강원도(江原道)로 발길을 옮기고 신라(新羅) 부흥운동(復興運動)의 거점(據點)인 설악산(雪嶽山)으로 향했다.

이때 태자(太子)와 동행(同行)한 죽방부인박씨(竹房夫人朴氏)와 덕주공주(德周公主)는 도중(途中) 월악산 미륵사에 일시 머물렀다.

왕자(王子) (), (), 은 자경사(自經死)했으며 왕자(王子) ()은 김천 법수사를 거쳐 해인사(海印寺)에 은거(隱居)하였다. 왕자(王子) 명종(鳴鐘), () 선웅(善雄), 순웅(順雄)은 송도(松都)로 동반(同伴)하였다.

1122日에는 왕건(王建)의 장녀(長女) 낙낭(樂浪)과 혼인(婚姻)하였으며, 또 왕건(王建)이 신라(新羅) 왕실(王室)에 청혼(請婚)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종백부(從伯父) 억렴(億廉)의 딸 덕용(德容)과 혼인하였으며 이분이 바로 왕건(王建)의 제오비(第五妃) 신성왕후(新聖王后) 김씨(金氏)이다.

왕도금성(王都金城)을 경주(慶州)로 개칭(改稱)하였으며 신란궁(神鸞宮)을 경순왕(敬順王)에게 주고 식읍(食邑) 8000호를 주고 경주(慶州)의 사심관(事審官)을 삼아 부호장(副戶長)이하 관직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 후 제천(堤川) 백운이궁(白雲離宮) 고자암(高自庵)을 비롯하여 원주(原州) 용화사별궁(龍華寺別宮), 용문사해당전(龍門寺海棠殿), 연풍(延豊)의 의황산양산전(義皇山陽山殿), 보령(保寧) 숭암산(崇巖山) 성주사이궁(聖住寺離宮)등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97844일 유화궁(柳花宮)에서 향년(享年) 97세로 훙거(薨去)하셨다.

김일(金鎰) 912(神德王1)?

()는 일() ()는 겸용(謙用)으로 경순대왕비(敬順大王妃) 죽방부인박씨(竹房夫人朴氏)의 장남(長男)으로 월성(月城)에서 태어났으며 경순대왕(敬順大王)이 즉위(卽位)한 그해 가을에 태자(太子)에 책봉(冊封)되었다. 929년 상국(上國) 김유렴녀(金裕廉女) 영란(英蘭)과 혼인(婚姻)하였으며, 930() 장남(長男) 선웅(善雄)932년 차남 순웅(次男順雄)이 출생(出生)하였다.

93510월 경순대왕(敬順大王)은 양국(讓國)에 관한 군신회의(羣臣會議)를 열어 논의(論議)하였으나 군신(羣臣)의 의논(議論)은 혹은 가()하다 하고 혹은 불가(不可)하다고 하였다.

태자(太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存亡)에는 반듯이 천명(天命)이 있으니 마땅히 충신의사(忠臣義士)와 더불어 민심(民心)을 수합하여 스스로 굳게 함이 다한 후에 말것이니 어찌 천년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어 주겠습니까?” 하였다.

대왕(大王)은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같아 형세(形勢)는 능히 온전히 할 수 없으니 백성(百姓)을 차마 내가 참혹(慘酷)하게 할 수 없다. 하고 대왕은 고려(高麗)에 귀부(歸附)하였다.

태자(太子)는 통곡(痛哭)하면서 대왕(大王)과 이별(離別)하고 죽방모후(竹房母后)를 모시고 누이동생 덕주공주 그리고 충신열사와 맹장군(孟將軍)등 일만여인은 왕경(王京)을 떠나 영천(永川)의 금강산성(金剛山城)과 모자산(母子山)에서 유숙(留宿)하다가 군위(軍威)의 적라산(赤羅山)을 지나 상주(尙州) 천봉산(天鳳山)을 거쳐 문경(聞慶)의 조령(鳥嶺)을 넘어 괴산(槐山) 연풍(延豊)의 계립령마골참(雞立嶺摩骨站)에서 류진(留陣)하고 충주(忠州) 월악산(月岳山)에 입산(入山)하여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쌓고 덕주사(德周寺)와 미륵탑(彌勒塔)을 쌓고 구국(救國)기도(祈禱)를 올리고 덕주공주(德周公主)는 이곳에 세천(世阡)되었다. 태자일행(太子一行)은 충주(忠州) 국망산(國望山)을 넘어 원주(原州)의 치악봉(雉岳峰)을 거쳐 양평(楊平)의 미지산(彌智山)인 용문사(龍門寺) 경내(境內)에 와서 은행목(銀杏木)을 심고, 홍천(洪川)의 지왕동(至王洞)에서 일행(一行)과 수비대(守備隊)가 잠정(暫定) 주둔(駐屯)하다가 인제(麟蹄)의 한계령(寒溪嶺)에서 한계성(寒溪城)을 쌓고 궁전(宮殿)과 군창(軍倉)과 옥녀탕(玉女湯)과 천제단(天祭壇)을 지었으며, 금부리(金富里)와 갑둔리(甲屯里)에는 왕족(王族)과 유족들이 웅거(雄據)하여 제2의 신라(新羅)를 재건(再建)할 목적(目的)으로 옥대곡(玉垈谷)에 체제(體制)의 질서유지(秩序維持)를 위하여 옥사(獄舍)를 설치(設置)하고, 강병곡(降兵谷)에 추종자(追從者)들의 통치부(統治府)를 마련하고, 성황당(城隍堂)에 방목(防木)을 식재(植栽)하고, 만가곡(挽歌谷)에는 맹창골에서 맹창장군(孟昶將軍)의 군훈련장(軍訓鍊場)이 있고, 태자(太子)가 가져온 옥새(玉璽)를 옥새암(玉璽岩)속에 소장(所藏)하고, 천지곡(天志谷)에 천제단(天祭壇)을 설치(設置)하여 구국(救國)의 기도(祈禱)를 올리고, 태자(太子)가 웅거(雄據)하는 풍남대(風喃垈)를 건축(建築)하고, 단지곡(斷趾谷)에는 단죄소(斷罪所)를 설치(設置)하고, 수령동(首軨洞)에 수거고(手車庫)를 설치(設置) ()바위에는 비상시(非常時)를 대비(對備)하여 군량(軍糧)을 비축(備蓄)하고 양구(楊口) 노고성(老姑城)의 고적봉군사전략기지(鼓笛峰軍士戰略基地)를 형성(形成)하였으며, 군량리(軍糧里)에는 군량미(軍糧米)를 비축(備蓄)하는 창고(倉庫)를 설치(設置)하였다. 금화(金化)는 신라(新羅) 부흥운동(復興運動)의 중요거점(重要據點)이었으며 안전(安全)한 이곳에서 머므르시던 태자(太子)의 어머니 박씨왕비(朴氏王妃)가 훙서(薨逝)하자 삼신산(三神山) 삼갑사(三甲寺) 인근(隣近)에 세천(世阡)되니 너무도 비통(悲痛)하여 개경(開京)을 향하여 망배(望拜)한 후 이제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리라 하고 돌아와 세천(世阡)하시니 신라재건(新羅再建)이 미급(未及)되 인제유민(麟蹄遺民)들이 금부리(金富里)3곳에 전각단간(殿閣單間)을 지어 영혼(靈魂)을 추모(追慕)하고, 단오절(端午節)과 중양절(重陽節)에 천년간(千年間)을 행사(行祀)하였으며, 그 애절(哀切)한 사연(事緣)을 전하고 있다.

김굉(金鍠) 914(神德王3)~ ? (梵空公)

자(字)는 진용(珍用) 법명(法名)은 범공(梵空) 시호(諡號)는 의영(懿英)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차남(次男)이다. 아버지 경순대왕(敬順大王)이 고려(高麗)에 손국(遜國)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태자(太子) 김일(金鎰)과 극력반대(極力反對)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통곡(痛哭)하며 부인(夫人):옥저하씨(沃沮河氏) 원호(元澔)의 딸)과 두 아들을 버리고 김천(金泉) 법수사(法水寺)에서 삭발(削髮)하고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생을 마쳤다. 평장사(平章事)에 제수(除授)하고 묘는 개풍군영남면용흥리(開豊郡嶺南面龍興里)에 있다. 장남(長男) 운발(雲發)은 나주군(羅州君)에 책봉(冊封)되어 후에 나주김씨(羅州金氏)로 분적(分籍)했다.

김종(金鐘) 916(神德王5)~ ? (永芬公)

시호(諡號)는 영분(永芬). ()는 명종(鳴鐘), 군호(君號)는 경주군(慶州君)이다. 경순대왕비(敬順大王妃) 죽방박씨(竹房朴氏)3남으로 부왕(父王)이 손국(遜國)할 때 일(), () 양형(兩兄)이 개골산(皆骨山), 해인사(海印寺)로 각각(各各) 떠나자 부왕(父王)을 따라 개경(開京)으로 백료(百僚) 사서(士庶)와 함께 갔다. 고려초기(高麗初期) 어지러운 세파(世波)에 부왕(父王)의 뜻을 잘 헤아려 효성(孝誠)을 다함으로 음덕(蔭德)을 힘입어 번족(蕃族)함과 시대(時代)에 따라 나라와 민족(民族)에 공헌(貢獻)한 많은 인걸(人傑)이 배출(排出)되었다. 배위(配位)는 박씨(朴氏)이며 묘는 경주(慶州) 형제산북동방동임좌(兄弟山北東方洞壬坐)이다.

김감(金鑑) 937(高麗太祖20)1028(顯宗20) (大安君)

는 은열(殷說)이고, 벼슬은 시중시랑보국평장사(侍中侍郞輔國平章事), 군호(君號)는 대안군(大安君)이다. 왕건태조후비(王建太祖後妃) 신명순성태후유씨녀(神明順成太后劉氏女) 낙낭공주(樂浪公主)와 경순왕(敬順王)과 혼인(婚姻) 경순대왕(敬順大王)4째아들이다. 배위(配位)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며, 는 태자태사한림원령언위(太子太師翰林院令彦撝)이다. 묘는 개성부북십리종암하(開城府北十里鍾岩下) 오룡산남록임좌(五龍山南麓壬坐)이다

김순웅(金順雄) 932(高麗太祖12)? (大將軍公)

태자김일(太子金鎰)2남으로 배위(配位)는 강능김씨(江陵金氏) 대상선환(大相宣喚)의 딸이다. 경순대왕(敬順大王)이 고려(高麗)에 귀부(歸附)할 때 형() 선웅(善雄)과함께 송도(松都)에 와서 귀족(貴族)들의 양육(養育)을 받았다.

일찍이 응양군낭장(膺楊軍郎將)을 시작(始作)으로 거란등 북방(北方)의 여러 부족(部族)들이 침략(侵略)이 잦은 변경방어(邊境防禦)에 함께 하였으며 안서홀성주(安西忽城主:現 海州)를 역임(歷任), 각지(各地)의 축성(築城)을 선도하였고 황해도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가 되어 고려(高麗) 4대 광종(光宗)의 북방방위(北方防衛)에 큰 몫을 하여 왕권신장(王權伸長)과 제도정비(制度整備)를 할 수 있었다. 장군(將軍)은 육위문대장군(六衛門大將軍)으로 승진(昇進)하였다.

()의 아들 인위(因渭), () 원정(元鼎)은 고려초(高麗初)의 명신(名臣)이다. 졸년(卒年)은 알수없다.

김숙승(金叔承) ? 1011(顯宗2)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둘째아들. 글안의 성종(聖宗)이 침입(侵入)했다가 돌아갈 때에 귀주별장(龜州別將)으로 그들의 퇴로(退路)를 막아 1만여(萬餘)의 군사(軍士)를 목베었다. 현종(顯宗) 10년에 공신(功臣)에 녹권(錄券)되고 뒤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를 받고 장군(將軍)으로 추증(追贈) 되었다.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분관조(分貫祖)이다.

김위영(金魏英) (貞簡公)

시호(諡號)는 정간(貞簡)이시며 대보공(大輔公)32세 경순대왕(敬順大王)5세손(世孫)이고 김부식(金富軾)의 증조(曾祖)이시다.

경순대왕(敬順大王)935년 신라(新羅)를 고려(高麗)에 양국(讓國)할 때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대왕(大王)이 경주(慶州)의 사심관(事審官)이 되어 부호장(副戶長) 이하(以下)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實際)로 부호장(副戶長) 이하(以下)를 지명(指名)한 기록(記錄)은 없고 김위영(金魏英)은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보면 경주주장(慶州州長)으로 봉직(奉職)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1283(忠烈王9)에 폐지(廢止)되었다.

김원충(金元冲)

경순왕의육세손, 경주주장(慶州州長) 위영(魏英)의 아들 정종(靖宗)과 문종(文宗)의 장인, 1036(정종2)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진봉사(進奉使), 고주(告奏)(使)가 되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옹진에서 파선(破船)되어 돌아왔고, 이듬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연호(年號)의 반포(頒布)를 요청(要請) 했다. 1040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있을 때 딸이 靖宗의 비(:容節德妃)가 되었다. 1047(文宗1)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정종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인위(金因渭) 955(光宗6)1024(顯宗15)

대장군(大將軍) 김순웅(金順雄)의 아들로 고려(高麗) 전기(前期)의 문신(文臣)이며 벼슬은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딸이 현종(顯宗)의 원순숙비(元順淑妃)로 책봉(冊封)되자 상서좌복야참지정사주국경조현개국남(尙書左僕射參知政事柱國京兆懸開國男)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를 받고 치사(致仕)했다.

김근(金覲)

경순대왕(敬順大王)7세손 김부식(金富軾)의 아버지 고려(高麗) 중기(中期)의 문신(文臣)으로 인종(仁宗)때의 학자(學者).이다.

1080(文宗34) 유홍(柳洪), 박인량(朴寅亮)과 더불어 송()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박인량(朴寅亮)과 그의 시문(詩文)에 감탄(感歎)하여 소화집(小華集)이라는 문집(文集)을 만들었다. 1086(宣宗3)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성균시(成均試)를 관장(管掌)하고 국제주좌간의대부(國際酒左諫議大夫)에 올랐다. 아들 넷이 모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였으며 사한(司翰)으로 문명(文名)을 빛냈다.

김심언(金審言)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셋째아들 렴()의 셋째 아들 고려 성종(成宗)때 등과(登科)하였으며 우보궐겸기거주(右補闕兼起居主)가 되고 1010(顯宗1)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거쳐 1015(顯宗6)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오른 뒤 서경유수(西京留守)로 나아갔다. 오성군(筽城君), 영광군(靈光君)에 봉()해졌다. 성종(成宗)께 시정지침(施政指針) 자료(資料)를 냈고 7대간의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낸 문한(文翰)이다.

정중부, 이의방등 무신(武臣)등에 의해 멸문(滅門)의 화()를 당해 세거지(世居地) 평장동(平章洞)에서 모두 흩어졌다. 982년 조부(祖父) 대안군(大安君)과 함께 봉은사(奉恩寺)에서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처음으로 제()를 올렸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며 영광김씨(靈光金氏)로 분적(分籍) 하였다.

김인관(金仁琯) 1057(文宗16)1148(睿宗2) (太師公)

시호(諡號)는 문순(文純)․官은 태사(太師)이며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6세손으로 양검(良儉)의 아들이다. 순종비선희왕후(順宗妃宣禧王后)와 남매지간(男妹之間)이다. 1110(睿宗5)에 과거(科擧)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연괴(連魁)하였는데 이는 모든 과목(科目)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다.

()은 박학(博學)한 대석학(大碩學)으로 왕()으로부터 금화모정(金花帽鞓)과 말 1필을 하사(下賜)받고 농지(農地) 20()도 받았다. 1115(睿宗10) ()나라의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오는 등 외교(外交)에도 발군(拔群)의 역할(役割)을 하였다.

벼슬은 낭중위위시경조산대부(郎中衛尉寺卿朝散大夫)

태자태사검교태사(太子太師檢校太師) 위위시경(衛尉寺卿:吏曹判書)를 역임(歷任)하였으니 백관(百官)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천서씨(利川徐氏)이며 욱()의 딸이다.

김부식(金富軾) 1075(文宗29)1151(毅宗5)

경순대왕(敬順大王)8세손(世孫), ()의 아들, ()는 입지(立志), ()는 뇌천(雷川), 부필(富弼), 부일(富佾)의 아우이다.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해주(海州))의 사록(司祿)참군사(參軍事)가 되고, 직한림(直翰林), 우간의(右諫議)를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1122(仁宗元年) 이자겸(李資謙)의 례()에 벗어난 행위(行爲)를 시정(是正)케 하고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수찬(修撰)하였다. 예종(睿宗)12년에 묘청(妙淸)의 서경천도설(西京遷都說)을 중지(中止)케 하고 묘청(妙淸)이 서경(西京)에서 반란(叛亂)을 하자 진압군(鎭壓軍)의 원수로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난()을 일으키자 평정(平定)하고 수충정난공신(輸忠靖難功臣)의 칭호(稱號)를 받았다.

1145(仁宗23)에 삼국사기(三國史記) 50()을 편찬(編纂)하였다. 그는 의종(毅宗) 즉위년(卽位年)에 낙랑개국후(樂浪開國侯)에 봉해지고 인종실록(仁宗實錄)을 주재(主宰)하였다.

중서령(中書令)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문열(文烈) 인종묘정(仁宗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김문열공문집(金文烈公文集)이 있다.

김인경(金仁鏡) 1168(毅宗22)1235(高宗22)

초휘(初諱)는 양경(良鏡) 시호(諡號)는 정숙(貞肅)이며 파조(派祖) 영분공(永芬公)10세손, 아버지는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낸 김영고(金永固)이다, 명종(明宗)때 문과차석(文科次席)에 급제(及第)하고 예부낭중(禮部郎中)을 거쳐 추밀원우승선(樞密院右丞宣)이 되었고 1227(高宗14) 수찬관(修撰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수찬(修撰)하였다. 직사관(直史官)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으며 고종초(高宗初) 조충(趙冲)이 강동성(江東城)의 거란을 토벌(討伐)할 때 판관(判官)으로 출전(出戰)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해 동진의 군사(軍士)가 쳐들어오자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使)가 되어 의주(宜州)에서 싸워 패전(敗戰)하여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좌천(左遷)되었다. 그후 형부상서한림학사(刑部尙書翰林學士)에 오르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인재(人材)를 취하였다. 1232(高宗19) 강화천도(江華遷都) 이듬해 왕경유수병마사(王京留守兵馬使)가 되고 정당문학이부상서감수국사(政堂文學吏部尙書監修國史)를 지내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문무(文武)를 겸하였으며 시문(詩文)에 능하고 예서(隸書)에도 뛰어났다.

김시흥(金時興)

시호(諡號)문열(文烈)이며, 경순대왕(敬順大王)의 넷째아들 대안군은열(大安君殷說)9세손(世孫)이다. 고려인종(高麗仁宗)때 문과(文科)에 올라 한림(翰林)울 거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지냈고 벼슬은 광록대부평장사(光祿大夫平章事)에 이르렀다. 북방방어(北方防禦)를 튼튼히 한 공로(功勞)로 주국상낙군개국남식읍천호(柱國上洛君開國男食邑千戶)를 하사(下賜)받았다. 금령군(金寧君)에 봉()해지고 금녕(金寧)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금녕(金寧)은 김해(金海)의 고호(古號)로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始祖)로하는 김해김씨(金海金氏)와 대보공(大輔公) 알지(閼智)를 시조(始祖)로 하는 금녕김씨(金寧金氏)로 양분(兩分)되었다. 금녕김씨(金寧金氏)의 본관(本貫)도 고려말(高麗末) 지명(地名)이 김해(金海)로 바뀌면서 금녕김씨(金寧金氏)도 김해(金海)로 부르게 되어 한때는 김해김씨(金海金氏)를 선김(先金), 금녕김씨(金寧金氏) 후김(後金)으로 구별(區別)하기도 했다.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충의공(忠毅公)김문기(金文起)의 이름이 나면서 김문기(金文起)의 후손(後孫)들을 자칭(自稱)하고 나서는 등 종통(宗統)을 어지럽힌다 하여 헌종(憲宗)12(1846) 격쟁(擊錚)하여 헌종(憲宗)으로부터 후김해김씨(後金海金氏)의 후손(後孫)은 모두다 경주김씨(慶州金氏)로 복관(復貫)하라는 윤허(允許)를 받고 관향(貫鄕)을 경주김씨(慶州金氏)로 하였다. 백촌공(白村公) 정통시비(正統是非)가 있었으나 확정판결(確定判決)을 못 받았다.

왕조실록(王朝實錄)과 안동권씨족보(安東權氏族譜), 영산신씨족보(靈山辛氏族譜)에서 백촌공(白村公)의 정통(正統)은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이미 명기(明記)되어 있어 경주김씨(慶州金氏) 백촌공파(白村公派)가 정통(正統)이라 하였다.

김요(金瑤) (文宣公)

()는 병옥(秉玉), 시호(諡號)는 문선(文宣)이며, 정숙공(貞肅公) 김인경(金仁鏡)의 손() ()2, 1292(忠烈王18) 등과(登科)했으며 상서병부낭중(尙書兵部郎中)이 되었고 그해 몽고(蒙古)의 강압(强壓)으로 강화(江華)에서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한 후 낭장(郎將)으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파견(派遣)되어 몽고(蒙古)의 약탈(掠奪), 도적(盜賊)들의 민가습격(民家襲擊)등으로 피폐(疲弊)한 주민(住民)의 민심(民心)을 위무진정(慰撫鎭靜)한 공()으로 벼슬이 삼중대광상장군계림부원군(三重大匡上將軍雞林府院君)에 올랐다. 문무(文武)를 겸한 명신(名臣)으로 시()에 능()하였다.

김승무(金承茂) (翰林侍御史公)

초명(初名)은 영(), 정숙공(貞肅公) 김인경(金仁鏡)의 손자(孫子) ()3남이며 용모(容貌)가 단아(端雅)하고 재식(才識)이 있었으며 일찍 등과(登科)하여 벼슬은 한림원사한(翰林院史翰)이 되었고 권신(權臣) 김준(金俊)의 총애(寵愛)를 받아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이때 뇌물(賂物)을 받은 승선(承宣) 허공(許珙)을 탄핵(彈劾)하다가 미움을 사기도 했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歷任)했다.

김군수(金君綏)

()는 설당(雪堂)이며, 김부식(金富軾)의 손자(孫子), 문신(文臣) 김돈중(金敦中)의 아들, 일찍이 문학(文學)에 재능(才能)을 보여 1194,(明宗24)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고종(高宗) 초에 시랑(侍郞)으로 각도(各道)의 찰방사(察訪使)가 되어 민정(民情)을 시찰(視察)했다. 고종(高宗)5년 거란병이 침입(侵入)하자 조충(趙冲)의 후임(後任)으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청백(淸白)과 애민(愛民)으로 이름이 높았다. 병마사(兵馬使) 김취려(金就礪)의 미움과 녹사(錄事) 노인수(盧仁綏)의 참소를 받아 한남(漢南:현 수원)으로 귀양갔다. 그 후손을 수소문(搜所聞)하였으나 찾지 못했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을 찬()하고 대() 그림을 잘 그렸다.

김남기(金南基) 1201(神宗4)~1275(忠烈王1) (禮儀判書公)

()는 정숙(定叔) ()는 포옹(浦翁) 예의판서(禮儀判書)이며, 태자김일(太子金鎰)10세손이다. ()이 등과(登科)한 즈음 1231년부터 몽고(蒙古)의 살례탑(撒禮㙮)이 대군(大軍)을 이끌고 고려(高麗)를 침공(侵攻)하기 시작(始作)하는 때였다. 예부낭중(禮部郎中)에 임()하면서 몽고군(蒙古軍)이 닥치는 곳마다 무고(無辜)한 백성(百姓)의 도륙(屠戮)과 약탈(掠奪)을 자행(恣行)하자 지식인(知識人)의 동요(動搖)를 막는데 큰 역할(役割)을 하였으며 봉익대부예의판서(奉翊大夫禮儀判書)에 오르면서 민생위무(民生慰撫)와 안정(安定), 국난극복(國難克服)에 학자(學者)들과 힘을 기울였다. 벼슬을 더하여 진현관대제학지춘추관사겸성균대사성지제고(進賢舘大提學知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知制誥)에 이르렀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월성박씨(月城朴氏)이며 제학(提學) ()의 따님이다.

김견명(金見明) 1206(희종2)1289(충열왕15)

() 일연(一然) ()는 무극(無極), 목암(睦庵), 김언필(金彦弼)의 아들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著者). 경북경산(慶北慶山)에서 출생(出生), 1214,(高宗1)9세때 해양(海陽):광주(光州),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學問)을 닦다가 1219(高宗6) 대웅(大雄)스님의 계()를 받고 승려(僧侶)가 되었다. 1227(高宗14) 승과(僧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1237(高宗24)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1246(高宗33) 선사(禪師), 1259년 대선사(大禪師)가되었으며 1261(元宗2) ()의 부름을 받고 상경(上京), 선월사(禪月寺)의 주지(住持)가 되고 목우화상(牧牛和尙)의 법통(法統)을 계승(繼承)했다. 1268년 임금의 뜻을 받들어 운해사(雲海寺)에서 큰스님 200명을 모아 대장경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열고 그 맹주(盟主)가 되었다. 1277년 운문사(雲門寺) 주지(住持)가 됐는데, 이때부터 본격적(本格的)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 집필(執筆)에 착수(着手)했다. 1283년 국존(國尊):국사(國師)으로 추대(推戴)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의 호()를 받고, 이해에 노모(老母)의 봉양(奉養)을 위해 고향(故鄕)에 돌아왔다. 이듬해 조정(朝廷)으로부터 토지(土地) 100(:3만평)을 받아 군위(軍威)에 인각사(麟角寺)를 중건(重建)했고 궁궐(宮闕)에 들어가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다. 무신난(武臣亂)이 일어나 최씨(崔氏) 정권이 안정되는 때에 나서 몽고침입(蒙古侵入)의 질곡의 시대에 살다가 그 압제(壓制)를 받던 시기(時期)에 살다가 갔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우리나라의 신화(神話)와 민간설화(民間說話)를 수집(蒐集)하고 특히 희귀(稀貴)한 향가(鄕歌), 불교관계(佛敎關係)를 수록(收錄)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우리 고대사(古代史) 연구(硏究)의 자료(資料)가 되고 있다.

김방(金昉) (隋城伯) 태자(太子) 김일(金鎰)11세손, 김남미(金南美)4, 몽고(蒙古)가 고려(高麗)를 복속(服屬) 시키자 일본정벌(日本征伐)을 요구(要求), 그 준비(準備)에 몰두(沒頭)하고 삼별초군(三別抄軍)의 저항(抵抗)으로 고려(高麗)가 무척 어려운 때 백성(百姓)을 돌볼 수 없는 시기(時期)에 부임(赴任)한 곳의 민심(民心)을 바로잡아 민생(民生)을 안정(安定)시키고 기강(紀綱)을 바로잡아 잘 다스려 삼중대광(三重大匡:鄕職一品) 수성백(隋城伯)에 봉()해졌다. 배위(配位)는 예산박씨(禮山朴氏)이며 시중 원익(侍中 元翊)의 따님이다. ()는 영변군 입원면 명당리 옥수동 후록(寧邊郡立元面明堂里玉水洞後麓)

김흔(金琿) 1239(高宗26)1311(忠宣王3) (忠宣公) 시호(諡號)는 충선(忠宣)이며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後 문간공경손(文簡公 慶孫)3남 충열왕(忠烈王)때의 공신(功臣) 1255(高宗42) 18세에 석능직(碩陵直)이 되어 내시(內侍)에 적()을 두었다가 감찰사(監察使)를 거쳐 순경왕후(順敬王后)의 종제(從弟)로서 총애(寵愛)를 받아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친하던 김문비(金文庇)가 죽자 여자관계(女子關係)로 탄핵(彈劾)을 받고 귀양갔다가 풀려 우승지(右丞旨), 부지밀직사첨의참리(副知密直司僉議叅理), 시랑찬성사(侍郞贊成事) 중찬(中贊) 등을 지냈다. 왕이 원()나라에 들어갔을 때 왕을 대신(代身)하여 행성(行省)을 잘 처리했다.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이 되고 삼사사(三司事)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에 봉()해졌다.

김남보(金南寶) (兵曹判書公)

()는 치노(致老)이며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의 손(). 병부시랑 정윤(兵部侍郞 正潤)의 장남(長男), 등과(登科)한 시기(時期)는 원()나라가 행성(行省)을 설치(設置)하고 고려(高麗)에 대하여 극도(極度)의 간섭(干涉)을 하던 때였다. 1335년에는 전의부령 이곡(典儀副令李穀)이 동녀징발(童女徵發)을 금지(禁止)하는데 대한 동조(同調)를 하기도 했다. 1340년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서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때도 도왔다. 하는 일마다 순조(順調)로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제수(除授)되었다. 배위(配位)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는 경기도남양주시진건면건천리고현자좌합폄(京畿道南楊州市眞乾面乾川里羔峴子坐合窆)

김인찬(金仁贊) 1336(忠肅王5)1392(李太祖1) (益和君)

()는 의지(義之), ()는 의암(毅庵),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익화군(益和君), 시조(始祖) 대보공(大輔公)45세손 대안군 은열(大安君 殷說)17세손으로 공민왕(恭愍王)때 진사(進士)가 되었고 우왕(禑王)때는 북청천호장(北靑千戶長)으로 있으면서 백금(白金) 50냥으로 굶주리는 백성(百姓)을 도왔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소문(所聞)을 듣고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시(威化島回軍時)에 함께 하였다. 1390년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으며 개국후(開國後)에는 태조(太祖) 친위병(親衛兵)을 지휘(指揮)했다. 1392년에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으로 익화군(益和君)에 책봉(冊封)되었다.

김균(金稛) 1341(忠惠王2)1398(太祖7) (雞林君)

경순대왕(敬順大王)15세손, 공역승(供驛丞) 남미(南美)의 현손(玄孫), 예빈경(禮賓卿) ()의 증손(曾孫), 예의판서(禮儀判書) 기연(起淵)의 손자(孫子), 지문하부사공(知門下府使公) 지윤(智允)의 장남(長男), 1360년 성균시(成均試)에 등과(登科) 1370년 삼사판관(三司判官), 1380년 밀직좌승선(密直左丞宣), 1392년 중추원부사(中樞院府使), 그해 71112공신회맹문(功臣會盟文)을 썼으며 이성계(李成桂)가 왕위(王位)에 오르면서 조선익대개국공신(朝鮮翊戴開國功臣)에 책록(策錄)되고 1395년 계림군(雞林君)에 봉()해졌다

13988월에는 추충협찬정난개국정사공신(推忠協贊靖難開國靖社功臣)이되었고 제숙공(齊肅公)의 시호(諡號)를 추증(追贈)받으시고 16669대손 시진(始振)에 의해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으로 특상추봉(特上追封)되셨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며 현()의 따님이나 일찍 돌아가시고, 정경부인무송윤씨(貞敬夫人茂松尹氏)는 식()의 따님이다.

김헌(金禾憲) (松岡公)

자는 경한(敬漢), 호는 송강(松岡)이며, 경순대왕(敬順大王)15세손이고 지문하부사공(知門下府事公) 지윤(智允)2, 고려말(高麗末) 왜구(倭寇)가 서남해안(西南海岸)을 약탈(掠奪)하는 때에 등과(登科)하여 이부낭중(吏部郎中)을 거쳐 시랑(侍郞)이 되었으며 어려운 시기(時期)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歷任)하였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함흥(咸興)에 머므르자 관직(官職)을 사양(辭讓)하고 영흥(永興)에 자리를 잡아 번족(蕃族)하였다. 배위(配位)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의 따님이다.

김서(金禾黍) (貞肅公)

()는 경윤(敬倫), 시호(諡號)는 정숙(貞肅)이며, 경순대왕(敬順大王)15세손으로 좌승선(左丞宣) 지선(智宣)의 장남이다.

용모(容貌)가 장대(壯大)하고 총명(聰明)하여 일찍이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낭중(郎中)으로 입사(入仕)한 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侵入)등으로 도탄(塗炭)에 빠져있는 민생(民生)의 구휼(救恤)에 힘썼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승진(昇進)하면서 더욱 선행(善行)을 베풀었다. 배위(配位)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인백(仁伯)의 따님이다.

김을권(金乙卷) 1344(忠惠王5)? (兵曹判書公)

()는 치보(穉寶), ()는 춘정(春汀)이며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5세손이고 감역(監役) 천응(天應)의 장남(長男)이다. 비교적(比較的) 어린 나이에 등과(登科)한 후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1376년 왜구(倭寇)가 공주(公州)를 공략(攻略)할 때 종군(從軍)하기도 하였으며 그때 서해안(西海岸)의 백성(百姓)들이 두려움속에 살고 있음을 보고 여러 대처(對處) 방안(方案)을 제시(提示)하기도 하였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임()하면서 민가들의 어려움을 돕다가 관직을 그만두고 양주건천(楊州乾川)에 살았다. 배위(配位)는 오천정씨(烏川鄭氏)이며 기원(琪元)의 따님이다.

김온(金穩) (忠文公)

()는 경중(敬重), 시호(諡號)는 충문(忠文)이며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歷任)하셨다. 지문하부사공(知門下府使公) 지윤(智允)3남으로 등과(登科)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있으며 고려(高麗)가 운명(運命)을 다하여 가고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해짐을 한탄(恨歎)하고 관직(官職)을 사직(辭職), 처자(妻子)를 버리고 입산후(入山後) 밖에 나오지 않고 고려(高麗)에 충성(忠誠)을 종신(終身)토록 하였다. 이태조(李太祖)가 충성심(忠誠心)을 칭찬(稱讚)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贈職)하였다

김능(金稜) (縣令公)

()는 성문(誠文), 경순대왕(敬順大王)15세손으로 공민왕(恭愍王)때 음보(蔭補)로 입사(入仕)하여 낭중(郎中), 시랑(侍郞)을 역임(歷任)했고 1391년 고성현령(固城縣令)으로 부임(赴任)했다가 조선국(朝鮮國)이 건국(建國)되자 곧 사임(辭任)하고 개풍(開豊:豊德)으로 귀향(歸鄕)했다. 배위(配位)는 파평윤씨(坡平尹氏) 경노(敬老)의 따님이며, 묘소(墓所)一云 안동(安東)이시다.

김을적(金乙適) 1346(忠穆王2)1430(世宗12)(府使公)

()는 치당(穉堂),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5세손, 감역(監役) 천응(天應)2남으로 등과후(登科後) 찰방(察訪)을 시작(始作)으로 순문사가 되면서 왜구(倭寇)의 약탈(掠奪)이 심한 동해안(東海岸)을 순행(巡行)하며 격려(激勵)하였다. 13823월에는 왜구(倭寇)가 평해(平海), 삼척(三陟), 울진(蔚珍), 우계(羽溪),등의 해안(海岸)을 덥치고 6월에는 경산(慶山), 대구(大邱)등 내륙(內陸)에 침투(浸透)하였을 때 울주부사(蔚州府使)가 되었고 잘 방어(防禦)했다. 이후(以後) 여러 관직(官職)을 했으나 알 수 없고 이후(以後) 고향(故鄕) 양주(楊州)에 가지 않고 영일군(迎日郡) 신광에 살게 되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여산송씨(礪山宋氏) 근수(根守)의 따님이다

김을진(金乙軫) 1348(忠穆王4) ? (掌令公)

()는 치재(穉載), ()는 설당(雪堂),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5세손, 감역(監役) 천응(天應)3남이며 문과(文科)에 등과후(登科後)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시작(始作)으로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叅議)를 역임(歷任)하고 고려(高麗)가 국운(國運)을 다하자 형들을 따라 영천(永川)으로 낙향(落鄕)하였다. 배위(配位)는 성산이씨(星山李氏) 병근(炳謹)의 따님이며 묘()는 실전(失傳)하였고 영천화산면화촌(永川花山面花村)에 설단(設壇)하였다.

김자정(金子汀) 1349(忠定王1) ? (典書公)

초휘(初諱)는 진룡(晉龍),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14세손 통례문부사지제고(通禮門副使知制誥) ()의 장남(長男) 1370년 이후(以後) 왜구(倭寇)가 서남해(西南海)에 침범(侵犯)이 잦을 때이다. 왜구(倭寇)가 지나간 뒷처리에 몰두(沒頭)했다. 벼슬은 공조전서(工曹典書)로 민부(民部)의 일을 하면서 조선세종(朝鮮世宗)때 통정대부예조참의지제교(通政大夫禮曹叅議知製敎)에 증직(贈職) 되었다. 묘는 청송안인리(靑松安仁里)이며 1980년 청원군남일면지북리(淸原郡南一面池北里)에 설단(設壇)하였다.

김을범(金乙範) 1350(忠定王2) ? (叅議公)

()는 치홍(穉洪),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5세손(世孫), 감역(監役) 천응(天應)4, 1408년 생원시(生員試)에 등과 형조별제(刑曹別提)를 시작으로 형조(刑曹), 예조(禮曹), 이조(吏曹)등 삼조(三曹)의 참의(叅議)를 역임(歷任)했고 고려말(高麗末) 양주(楊州)를 떠나 기계(杞溪)로 이주(移住)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경산전씨(慶山全氏)이며 정랑(正郞) 동오(東五)의 따님이다.

김자수(金自粹) 1351(忠烈王3)1413(太宗13)(桑村公)

()는 순중(純中), ()는 상촌(桑村)이다. 통례문부사지제고(通禮門副使知制誥) ()二子이다.

1374(恭愍王23)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전교부령(典敎副令)을 시작(始作)으로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를 거쳐 천변(天變)이 잦자 민심(民心)이 흉흉하여 연복사탑중수(演福寺塔重修)의 중지(中止)를 상소(上訴)하기도 했다. 그 뒤 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를 거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 都觀察使)를 역임(歷任)후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除授) 받았다. 고려말(高麗末) 충효대절(忠孝大節)을 겸비(兼備)한 충신(忠臣)이다. 고려(高麗)가 망()하자 안동(安東)에 은거(隱居)하였는데 태종(太宗)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任命)했으나 절명사(絶命詞)를 지어놓고 자결(自決)하였다. 배위(配位)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의 따님이다.

김을초(金乙軺) 1352(恭愍王1)? (持平公)

()는 치성(穉星),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5세손, 감역(監役) 김천응(金天應)5,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한 후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장기간(長期間) 지냈으므로 능숙(能熟)하게 처리(處理)하였으며, 벼슬이 통훈대부(通訓大夫)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고려말(高麗末) 고려(高麗)가 국운(國運)이 다하자 형() 되는 부사공(府使公) 을적(乙適)을 따라 낙향, 경주동해안(慶州東海岸) 가까운 곳으로 한때 은거(隱居) 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죽산박씨(竹山朴氏) 정언(正言) ()의 따님이다.

김충유(金冲裕) 1353(恭愍王2)? (杜溪公)

()는 선경(善卿), ()는 두계(杜溪),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鐘)15세손 판도정랑(版圖正郞) 서인(瑞仁)의 장남(長男), 공민왕(恭愍王)때 봉익대부이의판서평장사(奉翊大夫吏議判書平章事)를 지냈다. 1361년 홍건적(紅巾賊)이 개경(開京)에 침입(侵入)하므로 왕이 피난(避難)길에 이천(利川)에 당도(當到) 했을 때 개경(開京)이 점령(占領)되었음을 듣고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고 토벌(討伐)케 하였다.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이 개경(開京)을 수복(收復)했는데 어지러운 개경(開京)을 재건(再建)하고 수습(收拾)하는데 공()을 세웠다. 고려(高麗)가 운명(運命)을 다하자 아우 충한(冲漢)과 임선미(林先味)와 더불어 만수산(萬壽山)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 그 후 두류산(頭流山:智異山) 서쪽에 피적(被謫)하였는데 목가(木家)를 짓고 살았는데 이로 인()하여 두곡(杜谷)의 이름이 여기서 연유(緣由)한다.

김장유(金將有) (版圖判書公)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12세손 고려말(高麗末)에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는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심(忠誠心)을 버릴수 없어 충청도(忠淸道) 보은(報恩)에 은거(隱居)하였다. 배위(配位)는 이경(李瓊)의 따님이며 후배위(後配位)는 삼산이씨(三山李氏) 송고(松固)의 따님이며 모두 66녀이고 장남(長男)은 인신(仁臣)이라 기록(記錄)하고 있다.

김을화(金乙和) 1354(恭愍王3)1449(世宗31)

(存養齋公)

()는 지화(志和), ()는 존양재(存養齋)로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鐘)16세손, 감역(監役) 천응(天應)6, ()은 강호(江湖) 김숙자선생(金淑滋先生) 하에서 공부했는데, 비금인소급(非今人所及)이라 하고 장래(將來) 큰 기대(期待)를 하였다. 1411년 사마시(司馬試)에 등과(登科)하여 경성병마사(鏡城兵馬使)가 되었고 이어 길주도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 태종(太宗)11년에 용무시위사도순문사(龍武侍衛司都巡門使)를 거쳐 전라도수군절도제사(全羅道水軍節度制使)가 되었다.

1419년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로 장천군이종무(長川君李從茂) 영상(領相) 유정현(柳廷顯)과 함께 충청(忠淸), 경상(慶尙), 전라(全羅), 삼도병(三道兵)을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를 토벌(討伐)하여 큰 공()을 세웠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칭찬(稱讚)하여 예조판서겸경연춘추관사(禮曹判書兼經筵春秋館事)에 승진(昇進)케 하였다.

1454년 단종(端宗)이 공적(功績)을 기리어 제물(祭物)과 제문(祭文)을 하사(下賜)했다. 단소(壇所)는 영천자포리평룡산하(永川自浦里平龍山下)에 있다.

김충한(金冲漢) 1355(恭愍王4) ? (樹隱公)

()는 통경(通卿), ()는 수은(樹隱),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鐘)15세손, 판도정랑(版圖正郞) 서인(瑞仁)2, 출생(出生)때부터 남다른 바가 있었으며 많은 서책(書冊)을 읽었다. 일찍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고 관직(官職)에 임()했는데 깊은 사려(思慮)와 관대(寬大)하게 처리하였으며 벼슬은 봉익대부예의판서(奉翊大夫禮儀判書)에 이르렀는데 나라가 그릇되어감을 보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정포은(鄭圃隱) 등 팔은(八隱)과 우의(友誼)가 좋았으며 더불어 우국(憂國)하였다. 고려(高麗)의 운()이 다했음을 보고 고려(高麗)에 대하여 절의(節義)를 지킬 것을 임원미(林元味)와 굳게 약속(約束)하고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으므로 남원(南原)으로 귀양 보냈다. 포혈(包趐)과 호촌(壺村)에 들어가 목가(木家)를 짓고 살았다. 이름하여 두동(杜洞):두곡(杜谷)이라 하였다. 강원도(江原道) 정선(旌善)산골에 칠현(七賢)의 유적비(遺蹟碑)가 있다. 태종(太宗)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 문민(文敏)을 주었다. 남원(南原)에 표절사(表節祠), 남원(南原) 두곡(杜谷)에 단소(壇所)가 있다.

김덕재(金德載) 1366(恭愍王15)1407(太宗7)

(兵曹判書公)

자는 도중(道重), 호는 벽송(辟松),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14세손, 공조참판(工曹叅判) 여심(汝深)의 아들, 음보(蔭補)로 입사(入仕)하여 낭중(郎中)을 시작으로 1382년 길주군(吉州軍)에서 사병(士兵)으로서 호발도(胡拔都)를 대파(大破)하는 전투(戰鬪)에 참전(參戰)하는 등() 크고 작은 왜구(倭寇)와의 전투(戰鬪)에서 지략(智略)과 용맹(勇猛)을 보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오른 후 곧 고려(高麗)의 운명(運命)이 기울어짐을 보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벼슬아치들과 어울렸다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조선(朝鮮)이 건국(建國)되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등극(登極) 했으나 이방원(李芳遠:太宗)에게 밀려 이성계(李成桂)는 함흥(咸興)에 머물게 되자 지난날의 귀양살이의 서운함을 이태조(李太祖)에게 직간(直諫)했다. 함경도(咸鏡道) 정평군(定平郡)에 살았고 정평군중흥리(定平郡中興里)에 비각(碑閣)이 있고 묘()는 용강리(龍江里), 교항리(橋項里)에는 공()과 정몽주(鄭夢周), 조광조(趙光祖),등 삼현(三賢)을 모신 사우(祠宇)가 있다.

김맹성(金孟誠) 1374(恭愍王23)1449(世宗31)

(僖敬公)

시호(諡號)는 희경(僖敬), 계림군(雞林君) ()의 장남(長男),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1396년 우대언(右代言)을 시작으로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무고죄인(誣告罪人)의 처형(處刑)에 풍헌관(風憲官)으로서 책임(責任)을 지고 파직(罷職)되어 보주(甫州)로 유배(流配)되었다. 1401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비행(非行)에 대하여 죄()줄 것을 상소(上訴)했는데 들어주지 않았다. 1404년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가 되어 국경(國境)넘어 여진족(女眞族)을 잘 다루었고 1427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흉년(凶年)이 들자 구황책(救荒策)을 올렸다. 1428년 형조참판(刑曹叅判)으로 분용미(分用米)를 추징(追徵)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회인(懷仁)에 유배(流配)되었다가 풀려났다. 143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에 다녀왔고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형조(刑曹), 호조판서(戶曹判書),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등을 역임(歷任)했다. 성품(性品)이 단아(端雅)하고 일을 빈틈없이 처리(處理)하였다.

김선(金瑄) ? 1514(中宗9) (咸原君)

파조(派祖) 현령(縣令) 김능(金陵)6세손, 도호부사(都護府使) 상관(尙寬)의 장남, 세종연대(世宗年代)에 장단(長湍)에서 출생(出生), 1468(世宗13) 식년정시병과(式年庭試丙科)에 급제(及第)하고 1475(成宗6)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도민종사관(徒民從事官)을 지낸 후 사헌집의봉상시정(司憲執義奉常寺正)20여년간 관직(官職)을 두루 역임(歷任)하고, 연산(燕山)9년 전주부윤(全州府尹), 평안감사(平安監事),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재임중(在任中) 중종반정(中宗反正)에 동참(同參)하여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에 녹훈(錄勳)되고 1519년 함원군(咸原君)으로 책봉(策封)되고 中宗9417()하셨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해평김씨(海平金氏) 숭례(崇禮)의 따님이며 계배(繼配) 정부인(貞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 사원(士元)의 따님이다.

김중성(金仲誠) 1378(恭讓王2)1450(世宗23)

(兵曹判書公)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2, 음보(蔭補)로 입사(入仕)한 후 조선초(朝鮮初)에 봉상주부(奉常主簿)를 시작으로 판관(判官)으로 오랫동안 일했으며 사안처리(事案處理)에 능했으며, 다시 첨정(僉正)이 된 후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 되었다.

김계성(金季誠) 1381(禑王7)1419(世宗17)

(吏曹判書公)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3, 1394(太祖2) 춘장방무과(春場榜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정의대부(正議大夫)에 오르고 산원대경(散員大卿)에 제수(除授)된 후 관직(官職)에서 물러난 후 누차(屢次) 입사(入仕)할 것을 명했으나 듣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일을 보좌(補佐) 하다가 42세로 단명(短命)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 정간(貞幹)의 따님이다. 증직(贈職)으로 자헌대부이조판서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오위도총부도총관세자좌빈객(資憲大夫吏曹判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左賓客)

김안민(金安民) 1397(太祖6) ? (監事公)

()는 상지(尙之),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의 손(), 병판공(兵判公) 김중성(金仲誠)의 장남, 어릴때부터 지혜가 돋보였으며, 1447(世宗29) 음보(蔭補)로 직장(直長)에 입사(入仕)하였으며, 해사처리(海事處理)를 잘 하였고, 1449(世宗31)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에 승진(昇進)하였다. 배위(配位)는 진천송씨(鎭川宋氏) ()의 따님이며, ()는 파주주월리(坡州舟月里) 제단입석(祭壇立石)

김신민(金新民) 1398(太祖7)1466(世宗11)(副提學公)

()는 명지(明之),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의 손(), 병판공(兵判公) 김중성(金仲誠)2, 1423(世宗5)에 진사시(進士試)에 등과(登科)하고 이어 1426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어 부제학(副提學)에 서임(敍任)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이며 수명(守命)의 따님이다. ()는 고양대완리(高陽大宛里) 자좌(子坐)

김인민(金仁民) 1401(太宗1)? (判尹公)

초휘(初諱)는 천민(天民), ()는 덕지(德之),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의 손(), 병판공(兵判公) 김중성(金仲誠)3, 1435(世宗17) 진사(進士), 다음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다.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렀다. 단종(端宗)을 폐위(廢位)함은 불가(不可)하다고 직언청간(直言請諫)하여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좌천(左遷)되고 부임(赴任)한지 몇달, 정사(政事)를 보는 이들의 화합(和合)이 일지 못함을 외로워하며 생을 마쳤다. 청백리(淸白吏)로 선임(選任) 되었다. 배위(配位)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우성(禹成)의 따님이나 일찍 돌아가시고 계배(繼配) 장수황씨(長水黃氏)는 보신(保身)의 따님이며, ()는 청원군미원리간좌(淸原郡米院里艮坐), 기적비(紀績碑)가 있다.

김종순(金從舜) 1405(太宗5)1483(成宗14)(恭胡公)

()는 대주(大冑), ()는 경암(京菴), 시호(諡號)는 공호(恭胡),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의 손자(孫子), 이조판서공(吏曹判書公) 김계성(金季誠)의 장남(長男), 1437(世宗19) 문음(門蔭)으로 충훈부사승(忠勳府司丞)이 됐는데 공신회맹명어문(功臣會盟命御文)을 작성(作成)했다. 1439년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을 거쳐 중부령(中部令), 감찰(監察)등을 지냈다. 그 뒤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가 부사직(副司直)이보흠(李甫欽)을 사직(司直)에 잘못 승진(昇進)시킨 사건(事件)에 연루(連累)되어 논죄(論罪) 되었으나 공신자손(功臣子孫)이라 하여 파직(罷職)에 그쳤다. 그 뒤 복직(復職)되어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 호조참판(戶曹叅判)에 올랐고 1462(世祖7) 청백리(淸白吏)로 선임(選任)되고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1463(世祖9)에는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이어 대사헌(大司憲),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역임(歷任)했다. 세조(世祖)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나 다시 세종(世宗),문종(文宗),단종(端宗),세조(世祖),예종(睿宗),성종(成宗), 육조(六朝)의 청백리(淸白吏)로 천거(薦擧)되었다.

김영년(金永年) 1410(太宗10) (判官公)

()는 형부(衡夫), ()는 퇴헌(退軒), 상촌공(桑村公) 김자수(金自粹)의 손자(孫子), 소윤공(少尹公) ()의 장남(長男), 1439(世宗21)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것으로 보며, 조용하고 강직(剛直)한 성품(性品)으로 외관직(外官職)을 원해 강원도찰방(江原道察訪)을 시작(始作)으로 판관(判官)을 오랫동안 봉직(奉職)했다. 조부(祖父)를 생각하며 조금도 남을 괴롭히지 않고 청백리(淸白吏)다운 면모(面貌)를 보였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해풍김씨(海豊金氏) 재수(在壽)의 따님이다. ()는 영동군단전리자좌(永同郡丹田里子坐)

김영원(金永源) 1415(太宗15)1449(世宗31)(佐郞公)

()는 퇴와(退窩), 태사공(太師公) 인관(仁琯)11세손, 소윤공(少尹公) ()2, 글씨를 잘 썼으며 세종(世宗) 17년경에 음보(蔭補)로 입사(入仕)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임하면서 내외관직(內外官職)의 비위(非違)를 철저(徹底)히 감찰(監察)하여 세종(世宗)임금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룩하는데 일익(一翼)을 담당(擔當)했으며 잠시 경상도사(慶尙都事)의 임무(任務)를 충실(充實)히 했으며, 다시 병조(兵曹),호조좌랑(戶曹佐郞)을 역임(歷任)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삼척김씨(三陟金氏) ()의 따님이다. 묘는 신림면(新林面)에서 고양시대자동갑좌(高陽市大慈洞甲坐)1970510일에 천묘봉안(遷墓奉安)했다.

김영전(金永氵前) 1416(太宗16)1487(成宗18) (司丞公)

() 퇴암(退菴), 상촌공(桑村公) 김자수(金自粹)의 손(), 소윤공(少尹公) ()3, 1447(世宗23) 생원시(生員試)에 급제(及第)하고 사헌부사승(司憲府司丞)이 되어 백관(百官)들이 직분(職分)에 충실(充實)하도록 하였으며 장기간(長期間) 일하면서 일 처리가 신속(迅速)하였다. 사헌부사승(司憲府司丞)의 직분(職分)을 다 했고 유력(有力)한 분의 비리(非理)와 행실(行實)을 상소(上疏)했다가 꾸지람(被譴)을 받고 전라도영광군수(全羅道靈光郡守)로 가게 되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 함양박씨(淑夫人 咸陽朴氏)이며 하신(河信)의 따님이다. ()는 익산(益山)이나 실전(失傳)되었다.

김영유(金永濡) 1418(太宗8)1495(燕山1) (恭平公)

()는 택부(澤夫), ()는 퇴제(退齊), 태사공(太師公) 김인관(金仁琯)11세손, 소윤공(少尹公) ()4, 1447(世宗2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任命)되어 감찰언정(監察言正)등을 거쳐 1457(世祖3)에 평양소윤(平壤少尹)이 되었다. 1465(世祖11) 에 승문원판사(承文院判事), 이어 대사성(大司成)을 역임(歷任), 호조참의(戶曹叅議)에 전직(轉職)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형조참판(刑曹參判), 공조참판(工曹叅判)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대사헌(大司憲),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거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3(成宗14) 한성좌윤(漢城左尹), 그 후 행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내고 70세로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 서룡(瑞龍)의 따님이다. ()는 상촌공묘역 안산무좌(桑村公墓域 案山戊坐)

김 당(金 璫) 1465(世祖11)1532(中宗27) (恭節公)

()는 옥이(玉耳), 호는 공절(恭節),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의 현손(玄孫), 병판공(兵判公) 김중성(金仲誠)2남 신민(新民)의 손(), 태경(泰卿)2, 1495(燕山1)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벼슬은 사관(史官)을 지내고 1507(中宗2) 사간(司諫)을 거쳐 장령(掌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歷任)한 후 1519(中宗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누소직간(累疏直諫)으로 폄적(貶謫)되었다가 풀려났다. 1523년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육조참판(六曹叅判)를 두루 지냈고 1526(中宗21)에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고 한성판윤(漢城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歷任)한 후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까지 오르고 재임중(在任中)에 세상을 떴다. 성품(性品)이 청렴(淸廉) 솔직(率直)했다는 평이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 ()의 따님이나 일찍 돌아가시고, 계배(繼配) 정경부인(貞敬夫人) 원주이씨(原州李氏) 정원(廷源)의 따님이다.

김광(金光) 1482(成宗14)1545(仁宗1) (壯庵公)

()는 희실(希實), ()는 장암(壯庵)이다.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김장유(金將有)7세손, 정언(正言) 김효정(金孝貞)의 장남, 1509(中宗4)에 생원시(生員試), 다음해인 1510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창능참봉(昌陵叅奉):(睿宗,安順王后陵)이 되었다.

1519(中宗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혼탁(混濁)한 세상(世上)을 멀리하고 시골 성족리(聲足里)에 돌아와 밭갈이하며 살았다. 배위(配位)는 청주한씨(淸州韓氏) 석륜(碩倫)의 따님이다. ()는 보은성족리유좌(報恩聲足里酉坐)

김정(金淨) 1486(成宗17)1521(中宗16) (冲庵公)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庵),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김장유(金將有)7세손 정언(正言) 효정(孝貞)2남이다. 1504(燕山1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 1507(中宗2)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 정언(正言)을 거쳐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함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복위(復位)를 상소(上疏)했다가 보은(報恩)의 함림역(含琳驛)에 유배(流配)되었다. 1516(中宗11)에 풀려 나와 응교서한(應敎書翰)에 임명(任命)되었으나 부임(赴任)하지 않았고 뒤에 부제학(副提學), 동부승지(同副承旨), 도승지(都丞旨),를 거쳐 이조참판겸홍문관제학(吏曹叅判兼弘文館提學)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뒤에 형조판서(刑曹判書)로서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兼任)하였다.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지치주의(至治主義) 실천(實踐)을 위해 미신타파(迷信打破), 향촌(鄕村)의 상호부조(相互扶助)를 위한 향약(鄕約)의 전국적(全國的) 시행(施行)등 많은 업적(業績)을 남겼다. 1519(中宗14)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투옥(投獄)되었다가 금산(錦山)에 장배(杖配), 다시 제주(濟州)에 안치후(安置後)에 사사(賜死)되었다. 시문(詩文)은 물론(勿論) 그림에 능하여 새 짐승 등을 잘 그렸다.

김천부(金天富) 1498(燕山4)1584(宣祖18)(金堤公)

()는 대온(大蘊)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김장유(金將有)8세손, 부사직(副司直) ()의 아들, 폭군연산군(暴君燕山君)이 축출(逐出)되고 사회(社會)가 안정(安定)되어 가는 시기(時期)로 가정(家庭)이 빈곤(貧困)한 중에 부친(父親)은 무관(武官)으로 먼 곳에 있으므로 모친(母親)과 아우들을 다 보살피는 효자(孝子)였다. 1519(中宗14)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으며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역임(歷任)하였다. 재임중(在任中) 선정(善政)을 베푼 실적(實績)이 알려져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증직(贈職) 되었다. 만년(晩年)에는 후진(後進) 양성(養成)을 위해 힘썼다. 공의 당숙(堂叔) 충암공(冲庵公) 김정(金淨)과 정암공(靜庵公) 조광조(趙光祖)의 향약(鄕約)의 전국적(全國的) 시행(施行)에 선도적(先導的) 모범실천(模範實踐) 사례(事例)의 향촌(鄕村)을 이룩하였다.

김호(金虎) 1534(中宗29)1592(宣祖25) (月庵公)

()는 덕원(德元), ()는 월암(月庵),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鐘)21세손, 내금위어모장군(內禁衛禦侮將軍) 김숙린(金淑璘)의 아들, 1570(宣祖3) 무과급제(武科及第)하고 벼슬은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를 지낸 후 향리(鄕里)에 거주(居住)하였다. 1592(宣祖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당시(當時) 경주부(慶州府)의 지방관리(地方官吏)들이 도망(逃亡)하자 조정(朝廷)의 부름을 받고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이 되어 소모관(召募官)들과 경주(慶州)를 약탈(掠奪)하려는 왜병(倭兵)을 물리치고 울주계연(蔚州鷄淵)에서 왜()의 북상(北上)하는 적() 500기병(騎兵)과 맞서 싸우다가 85일 전사(戰死)했다. 당상관(堂上官)에 증직(贈職)되고 1758(英祖34)에 참판(叅判)으로 추증(追贈)되었다. 배위(配位)는 오천정씨(烏川鄭氏)이며 궁기(宮基)의따님이다. ()는 선도산해좌(仙桃山亥坐).

김명원(金命元) 1534(中宗29)1602(宣祖35)(忠翼公)

()는 응순(應順), ()는 주은(酒隱), 시호(諡號)는 충익(忠翼), 경림부원군(慶林府院君),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7세손, 대사헌(大司憲) 김만균(金萬鈞)2, 이황(李滉)의 문인(文人)으로 1558(明宗13) 사마시(司馬試)에 급제(及第)하고, 1561(明宗16) 식년문과갑과(式年文科甲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시니 할아버지 천령(千齡), 아버지 만균(萬鈞), 형님 경원(慶元)도 모두 문과(文科) 장원급제(壯元及第)를 하였으니 개국이래(開國以來) 삼대(三代)가 장원(壯元)하기는 처음이라 하였다. 벼슬은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고 저작박사(著作博士)로 승진(昇進)하였으나 이량(李樑)의 미움을 사 파직(罷職)되었으나 복직(復職)되고 선조원년(宣祖元年) 함경도(咸鏡道)의 군무상황(軍務狀況)을 두루 살펴보고 요해지(要害地)의 방비(防備)등을 자세하게 보고(報告)했다. 다음해에 경성부사(鏡城府使)가 되고 그 뒤 동래부사(東萊府使), 판결사(判決事), 정주부사(定州府使), 병조(兵曹)참판(叅判)을 역임(歷任), 1587년에 우참찬(右參贊)에 승진(昇進)하였다. 1589(宣祖22)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策錄)되고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1592(宣祖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순금사(巡禁使)가되었다가 팔도병마도원수(八道兵馬都元帥), 1597(宣祖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병조판서(兵曹判書)로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兼任)하였고, 1601년에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고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병서(兵書)와 궁마(弓馬)에 능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 ()의 따님이다. ()는 고양시관산동묘좌(高陽市官山洞卯坐)이다.

김종거(金鍾鐻) 1580(宣祖13)~ (濟庵公)

초휘(初諱)는 경대(景大), 개명(改名) 만정(萬鋌), 자(字)는 수옥(水玉), 호(號)는 제암(濟庵),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鐘)의 후손(後孫), 참의(叅議) 김응창(金應昌)의 아들, 벼슬은 음보(蔭補)로 선전(宣傳)을 지냈다.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시보(始譜)라 할 수 있는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를 1632년(仁祖10) 제암공(濟庵公)의 나이 52세때 시작(始作)하여 62세 때인 1642년에 완료(完了)할 수 있었다. 준기(準記)로는 7~8년간(年間) 여러 고장을 찾아 오래된 문적(文蹟)을 베끼고 또 6대조(代祖) 대우공(大祐公)이 소장(所藏)한 것과 중조(中祖) 적선공(積善公)의 필사본(筆寫本)을 참고(參考)하였다. 전체(全體) 계보(系譜)는 고려말(高麗末)로 계대계보기록(系代系譜記錄)으로 마감(磨勘)했다.

김시양(金時讓) 1581(宣祖14)1643(仁祖21)(忠翼公)

초명(初名)은 시언(時言) ()는 자중(子中) ()는 하담(荷潭), 경순대왕(敬順大王)의 후손(後孫)으로 비안현감(比安縣監)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1605(宣祖38) 정시문과병과(庭試文科丙科)로 급제(及第), 삼사세자시강원(三司世子侍講院)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611(光海3)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어 향시(鄕試)를 주관(主管)할 때 시제(詩題)에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比喩)한 문제(問題)를 출제(出題)했다하여 종성령해(鍾城寧海)로 유배(流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여러 관직(官職)을 거친 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活躍)하였고 난()이 평정(平定)되자 응교(應敎) 문학(文學)에 이어 1627년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로 부임(赴任) 경주(慶州) 숭혜전(崇惠殿)을 중건(重建)할 것을 계청(啓請)하였고 이를 유생(儒生) 김성원(金聲遠)이 중건(重建)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후 서북지방(西北地方)의 경비(警備)가 중요시(重要視) 되자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로 발탁(拔擢) 되었으며 1631(仁祖9)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라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 등을 겸임(兼任)하며 척화(斥和)를 주장(主張)했다. 그 후 강화유수(江華留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판춘추관사(判春秋館事)가 되었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천(錄薦)되었다.

김원립(金元立) 1590(宣祖23)1694(仁祖27)(葛川公)

()는 사탁(士卓)이며,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10세손, 찰방(察訪) 성진(聲振)2, 1613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유학자(儒學者)로서의 소양(素養)을 갖추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이 일자 홍무속(洪茂續)과 함께 상소(上疏)를 올려 광해군(光海君)]의 노여움에 하옥(下獄) 당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옥에서 풀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任命)되고 1627(仁祖5) 전주정시병과(全州庭試丙科)에 합격(合格)했다. 1628년 가주서(假注書)로서 종묘제사(宗廟祭祀)때 임금을 수행(隨行)한 공()으로 일자(一資)를 받았다. 1630년 지평(持平), 1635년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下賜)받았다. 그 후 내외직(內外職)을 고루 경험하고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任命)되었다. 소무영국원종(昭武寧國原從)의 공훈(功勳)으로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김홍욱(金弘郁) 1602(宣祖35)1654(孝宗5)(鶴洲公)

()는 문숙(文淑), ()는 학주(鶴洲),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상촌공(桑村公) 자수(自粹)9세손 찰방(察訪) ()의 아들, 이다. 1635(仁祖13)에 증광문과(增廣文科) 을과(乙科)에 급제(及第) 벼슬이 검열(檢閱)이 된 뒤 겸() 설서(說書)를 지냈다.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인조(仁祖)24년에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사직(辭職)하였다. 효종(孝宗)초에 승지(承旨), 충청도(忠淸道)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와 유배(流配)되어 죽은 그의 아들의 억울함을 상소(上疏)하다가 매맞아 죽었다 . 뒤에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서(著書)에 학주집(鶴洲集)이 있다.

김옥남(金玉男) 1611(光海3)1694(肅宗20) (雲岩公)

()는 화진(和振), 호는 운암(雲岩), 전서공(典書公) 자정(子汀)8세손, 사과(司果) 용원(龍元)의 아들, 1636(仁祖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운암산성(雲岩山城)에 포진(布陣)한 청군(淸軍)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워 전력부위겸사복수문장(展力副尉兼司僕守門將)이 되었고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영조(英祖)때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추증(追贈)됐으며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광주노씨(廣州盧氏) 가응(加應)의 따님이다. 묘는 철산명암리갑좌(鐵山鳴岩里甲坐)

김성원(金聲遠) 1602(宣祖35)1668(顯宗10)

()는 선명(善明), 영분공후(永芬公後) 월암공(月庵公) ()의 손자, 흥해군수(興海郡守) 이관(以寬)의 장남, 도성(都城) 유민(遺民)들이 경순대왕(敬順大王)을 기리는 사당(祠堂)을 세워 영정(影幀)을 모시고 제향(祭享)을 올렸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때 타버려 위패(位牌)만 모셨는데 1627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赴任)한 김시양(金時讓)이 계청(啓請)하고 이를 김성원(金聲遠)이 터를 잡아 중창하였으며 1794년 사태(沙汰)가 났을 때 현() 황남동(皇南洞)으로 이전(移轉)하였고 1887년에는 미추왕(味鄒王)과 경순왕(敬順王)을 병향(倂享)함과 1888년 김홍집(金弘集)이 문무왕(文武王)을 병향(倂享)하는 것이 성사(成事)되었고 1892년부터 김철희(金喆熙) 부윤(府尹)을 중심(中心)으로 숭혜전(崇惠殿) 보존(保存) 화수계(花樹稧)의 기틀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김남중(金南重) 1596(宣祖29)1663(顯宗4)

()는 백진(白珍). ()는 야당(野塘). 시호(諡號)는 정효(貞孝). 1618(光海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登用)되어 가주서(假注書)로 광해군(光海君)에게 입시(入侍)하였다. 1623(仁祖1) 검열(檢閱)․전적(典籍)․지평(持平)․장령(掌令)등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예조참의(禮曹叅議)로서 인조(仁祖)를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扈從)하였다. 1641년 대사간(大司諫)․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춘추관동지사(春秋館冬至使)가 되어, 사은부사(謝恩府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1658(孝宗9) 공조판서(工曹判書)․예조판서(禮曹判書)․형조판서(刑曹判書)․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에 이르렀다. 저서에《역대인감(歷代人鑑)》이 있다.

김필진(金必振) 1635(仁祖13)1691(肅宗17)

()는 대옥(大玉), ()는 평옹(萍翁), 풍애(楓崖)이다. 계림(雞林)() 김균(金稛)10세손,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 충익공(忠翼公) 명원(命元)4세손, 경천군(慶川君) 야당공(野塘公) 남중(南重)3남이다. 1657(孝宗8)에 진사(進士)가 되고 1667(顯宗8) 음보(蔭補)로 빙고별제(氷庫別提)를 거쳐 후성현감(厚城縣監)등 여러 외직(外職)에 임명(任命)되었으나 부임(赴任)하지않았다. 1667(肅宗4) 원주목사(原州牧使)로 갔을 때 경천묘(敬天廟)의 경순대왕(敬順大王) 영정(影幀)의 견소(絹素)가 삭아지고 객색(客色)이 본바탕을 잃게 되므로 다시 모사(模寫)하고 대웅전(大雄殿) 남측(南側)에 녹봉(祿俸)을 털어 신전(新殿)을 새로지어 이봉(移奉)하였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하였고 글씨를 잘 썼으며, 문집에《풍애유고(楓崖遺稿), 저서에《인감(人鑑)》등이 있다.

김주신(金柱臣) 1661(顯宗2)1721(景宗1)

자는 하경(廈卿), 호는 수곡(壽谷),세심재(洗心齋), 시호(諡號)는 효간공(孝簡公),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11세손, 증영의정(贈領議政) 일진(一振)2, 숙종(肅宗)의 계비(繼妃)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아버지로서 박세당(朴世堂)의 문인이다. 1694년 경주김씨(慶州金氏) 계림군파(雞林君派) 시보(始譜)의 서문(序文)을 썼다. 1696(肅宗22) 생원시에 합격하고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이 되었다. 1704년 순안현감(順安縣監)으로 있을 때 딸이 숙종계비(肅宗繼妃) 인원왕후(仁元王后)가 되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使)가 되고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도총관(都摠管)으로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임(兼任)하였다. 공은 일찍이 5세에 부친(父親)을 여의고 매일(每日) 성묘배례(省墓拜禮)하고 성년(成年)이 되어 외출했다 귀가(歸家)할 때는 10()밖에서 부친(父親)의 묘소(墓所)가 보이는 곳에서부터는 가마에서 내려 걸었고 부친(父親)이 돌아가신지 26년후인 1691년 나이31세에 부친묘소(父親墓所)에 석물(石物)을 입석(立石)하면서 소들이 석물(石物)을 운반(運搬)하느라 힘이들어 땀을 흘리며 혀를 빼어물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내 어찌 사람을 위해 저렇게 고생하는 소를 잡아 그 고기를 먹겠는가? 하고 평생을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한다. 저서(著書)에 거가기문(居家紀問), 수사차록(隨事箚錄), 산언(散言)이 있고, 문집(文集)에 수곡집(壽谷集)등이 있다.

김덕운(金德運) 1687(肅宗14)1742(英祖43)

()는 득보(得甫), ()는 진정재(眞靜齋),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13세손, 중석(重錫)2, 1715(肅宗4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 1758(英祖34)에 참봉(叅奉)이 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으며 항상(恒常) 몸가짐을 단정(端正)히 하였고 평생(平生) 청빈(淸貧)하게 지내며 후학(後學)을 양성(養成)하였다. 1760(英祖36) 귀중(貴重)한 선대(先代) 자료(資料)인 월성세승(月城世乘) 6권의 기록(記錄)을 남겼다.

김구연(金九衍) 1699(肅宗26)1742(英祖19)

()는 자구(子九),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12세손, 증이조참판(贈吏曹叅判) 개신(介臣)의 아들, 생부(生父) 주신(柱臣)2, 음보(蔭補)로 입사(入仕)하여 사복시별제(司僕寺別提)로 있다가 1727(英祖3)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세대(世代)가 바뀔 때마다 공신(功臣) 자손록(子孫錄)을 새로 써서 보관(保管)할 때 명어문서기공각보고(命御文書紀功閣寶庫)에 순웅대장군(順雄大將軍)이 마의태자(麻衣太子)의 아들임을 등출(謄出)해 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나주박씨(羅州朴氏)이며 필구(弼耈)의 딸이다. ()는 온양내범동건좌(溫陽內範洞乾坐)

김굉(金硡) 1703(肅宗30)1755(英祖31)

()는 대숙(大叔), 호는 독관재(獨觀齋),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14세손, 갈천공(葛川公) 원립(元立)의 현손(玄孫) 여시공(汝時公) 응호(應豪)의 장남, 1733(英祖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 1735(英祖11)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정언(正言)이 되었고 1747(英祖23) 장단고랑포리(長湍高浪浦里) 경순대왕능(敬順大王陵) 비문(碑文)을 찬()하였고 벼슬은 필선(弼善)에 이르렀다.

김효대(金孝大) 1721(景宗2)1781(正祖5)

()는 여원(汝原), 시호(諡號)는 정효(貞孝),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13세손, 주신(柱臣)의 손자(孫子), 참의(叅議) 후연(後衍)의 장남, 1737(英祖13)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돈령부참봉(敦寧府叅奉), 수원부사(水原府使), 등을 거쳐 승지(承旨) 병조참판(兵曹叅判), 병조판서(兵曹判書)등을 지냈다. 1780(正祖4)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있을 때 숭혜전(崇惠殿) 정문(正門)앞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울 것을 계청(啓請)하여 윤허(允許)를 받았으나 공역(工役)이 갖춰지지 않아 1814(純祖14)에 세워졌음.

김형대(金亨大) 1730(英祖6)1765(英祖41)

()는 계장(季長) 호칭(呼稱)은 인천부사공(仁川府使公)이며, 대장군공(大將軍公)25세손, 계림군(雞林君)13세손 주신(柱臣)의 손자(孫子), 후연(後衍)2자로서 주신(柱臣)의 형() 성신(聖臣)의 봉사손(奉祀孫)이다. 음사(蔭仕)로 일찍이 출사(出仕)하여 참봉(叅奉)을 시작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돈령부주부(敦寧府主簿), 장예원사평(掌隸院司評),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의령현감(宜寧縣監), 영주군수(榮州郡守), 인천도호부사겸수원진관병마동첨절제사(仁川都護府使兼水原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歷任)하였으나 176536세에 별세(別世)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풍산홍씨(淑夫人豊山洪氏) 진보(鎭輔)의 따님이다. ()는 파주시교하면야당리임좌쌍분(坡州市交河面野塘里壬坐雙墳)이나 도시계획(都市計劃)에 의해 고양시대자동(高陽市大慈洞) 선영(先塋)으로 천묘(遷墓)

김사목(金思穆) 1740(英祖17)1829(純祖29)

()는 백심(伯深), ()는 운소(雲巢), 시호(諡號)는 경헌(敬獻)이다.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14세손, 주신(柱臣)의 증손(曾孫), 참의(叅議) 후연(後衍)의 손자, 형조판서(刑曹判書) 효대(孝大)의 장남, 음보(蔭補)로 김제군수를 지낸 뒤 1772(英祖48)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부교리(副校理), 부승지(副承旨), 대사헌(大司憲), 관찰사(觀察使), 이조(吏曹), 형조(刑曹), 예조(禮曹)의 판서(判書)등을 거쳐 1808(純祖8) 우의정(右議政)을 지내고 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 좌의정(左議政), 령중추부사(領中樞府使)를 역임(歷任)했다. 1784(正祖8) 대안군(大安君)과 소보공(少保公)의 지석(誌石)을 발굴(發掘)하여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왕자(王子) 8형제(兄弟)들의 서차(序次)를 알게 되었다. 1785(正祖8) 대사헌(大司憲)때 경순대왕(敬順大王) 영정기(影幀記)를 썼다.

김사채(金思采) 1756(英祖32)1817(純祖17)

()는 유량(幼亮) 대장군공(大將軍公)26세손, 계림군(雞林君)14세손이며 형대(亨大)의 아들이다. 1803(純祖3)에 성균시(成均試)에서 3등으로 입격(入格)하여 동년(同年)에 건원능참봉(健元陵叅奉)을 시작(始作)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공조좌랑(工曹佐郞),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 현융원령(顯隆院令), 양구현감(楊口縣監), 담양도호부사겸담양진관병마동첨절제사(潭陽都護府使兼潭陽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歷任)하였고 배위(配位)는 숙인파평윤씨(淑人坡平尹氏) 도철(度喆)의 따님이나. 일찍 돌아가시니 계배(繼配)는 숙인해주오씨(淑人海州吳氏), 군수(郡守) 태노(泰魯)의 따님이다, ()는 파주시교하면야당리(坡州市交河面野塘里) 인천부사공형대묘우강임좌합폄(仁川府使公亨大墓右崗壬坐合窆)이나, 도시계획(都市計劃)에 의해 고양시대자동(高陽市大慈洞) 선영(先塋)으로 천묘(遷墓)

김영부(金永孚) 1783(正祖7)1830(純祖30)

()는 이휴(而休), 생부(生父)는 주신(柱臣)의 증손(曾孫) 사척(思拓), 사채(思采)의 계자(系子), 진사시(進士試)2등으로 급제(及第)하여 홍능참봉(弘陵叅奉)을 시작(始作)으로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 선략장군(宣略將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괴산군수(槐山郡守), 어모장군(禦侮將軍)등을 역임(歷任)하고 증손(曾孫)의 가자(加資)에 의해 증종삼품통훈대부예식원좌장례(贈從三品通訓大夫禮式院左掌禮)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위(配位)는 증숙부인전주이씨(贈淑夫人全州李氏), 현감(縣監) 의록(義祿)의 따님이다. ()는 파주시교하면야당리(坡州市交河面野塘里) 인천부사공형대묘우강계좌합폄(仁川府使公亨大墓右崗癸坐合窆)이나, 도시계획(都市計劃)에 의해 고양시대자동(高陽市大慈洞) 선영(先塋)으로 천묘(遷墓).

김정희(金正喜) 1786(正祖10)1856(哲宗7)

()는 원춘(元春), ()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200여개나 되며, 상촌공(桑村公) 자수(自粹)18세손(世孫) 판서(判書) 노경(魯敬)의 아들로서 백부(伯父) 노영(魯永)에게 입양(入養)됐다 문신, 문인, 금석활자, 서화가로서 1809(純祖9) 생원(生員)이 되고 181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설서검열(說書檢閱)을 거쳐 규장각시교(奎章閣侍敎)가 되었다. 그 후 24세에 생부(生父)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명유(名儒)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과 사귀었는데 이때 금석문(金石文)에 대한 소양(素養)을 깊게 했으며, 후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고증(考證)했다. 1840년 윤상도(尹尙度)의 옥사(獄事)에 연루(連累)되어 제주도(濟州道)에 위리안치(圍籬安置) 1848년에 풀려났다. 학문연구(學問硏究)에 있어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요도(要道)임을 주장(主張)하고 그것을 훈고(訓詁)로서 실천(實踐)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는 역대(歷代)의 명필(名筆)을 연구(硏究) 그 장점(長點)을 모아서 독특(獨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大成)시켰다.

김정집(金鼎集) 1808(純祖8)1859(哲宗7)

()는 구여(九如), ()는 석세(石世),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계림군(雞林君)16세손이며 증좌찬성(贈左贊成) 영수(永受)의 아들

1827(純祖27) 문과에 급제하고 승정원(承政院) 가주서(假注書), 설서문학(說書文學)등을 거쳐 순조(純祖)33년에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성(大司成), 이조참의(吏曹叅議),를 거쳐 1846(憲宗12)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로 재임시에 김대건(金大建) 신부(神父)를 체포(逮捕)하였으며 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義禁府事同知成均館事)를 역임했다. 1848(顯宗15) 개성용흥리(開城龍興里)에서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 묘비문(墓碑文)을 썼다. 저서(著書)로는 석세유고(石世遺稿)가 있다.

김창희(金昌熙) 1844(憲宗10)1890(高宗27)

()는 수경(守敬), ()는 석능(石菱), 둔재(鈍齋),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계림군(雞林君)17세손이며 문정공(文貞公) 정집(鼎集)의 아들, 음보(蔭補)로 명능참봉(明陵叅奉)이 되었고 1864(高宗1) 감조관(監造官)으로서 증광문과병과(增廣文科丙科)에 급제(及第), 내외직(內外職)을 두루 거쳐 공조(工曹),이조(吏曹),형조참의(刑曹叅議)를 역임(歷任)하고 1880(高宗17)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1881(高宗18) 월성가사(月城家史)를 찬()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때 청()에서 온 사람들의 영접관(迎接官)도 하고 1884(高宗31)에 한성판윤(漢城判尹)도 지냈다.

김홍집(金弘集) 1842(憲宗8)1896(建陽1)

초휘(初諱) 굉집(宏集), ()는 경능(敬能), ()는 도원(道園),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16세손이며, 이조참판(吏曹叅判) 영작(永爵)3, 1868(高宗5) 정시문과병과(庭試文科丙科)로 급제, 광양현감(光陽縣監)을 거쳐 1880년 수신사(修信使)가 되어 일본(日本)에 다녀왔다. 이어 중국인(中國人)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소개(紹介)하여 개화정책(開化政策)을 추진(推進)한 공()으로 예조참판(禮曹叅判)에 승진(昇進)했다. 그러나 척사운동(斥邪運動)이 전국(全國)으로 전암(展闇)되니 책을 소개(紹介)한 책임(責任)을 물어 사직(辭職)했다. 그 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등 국제문제(國際問題)에 부딛친 정세(政勢)에 다시 기용(起用)되어 미(),(),(),등의 수호조약(修好條約)의 부사(副使)로서 또한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체결(締結)의 부관(副官)으로서 외교(外交)수완(手腕)을 발휘(發揮)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1884년 예조판서(禮曹判書),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歷任)하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우좌의정(.左議政)등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締結) 그 직()을 사임(辭任)했다. 1888년 경주(慶州) 숭혜전(崇惠殿)에 문무왕(文武王)을 병향(倂享)하는 일을 주청(奏請)하여 윤허(允許)를 받았다. 경주부윤(慶州府尹) 김철희(金喆熙)에게 묘우(廟宇)를 중건(重建)하게 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나자 제 1차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을 조직(組織)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되었다. 청일전쟁(淸日戰爭)후 제2차 내각(內閣)을 조직(組織)하였으나 1896년 이후(以後) 친로세력(親露勢力)의 팽배로 다시금 무너지며 많은 대신(大臣)들이 피살(被殺)되고 그도 광화문(光化門)에서 난도(亂徒)들에게 살해(殺害)되었다.

김교석(金敎碩) 1867(高宗4)1917(倭政8)

()는 군실(君實), ()는 추당(秋塘),우성(愚醒), 대보공(大輔公)59세손, 계림군(雞林君)의 김균(金稛)18세손, 생부(生父)는 억수후(億壽后) 통사랑의금부도사(通仕郞義禁府都事) 완희(完熙)이며,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주신(柱臣)의 종가(宗家) 봉사손(奉祀孫) 상희(相熙)의 계자(系子)이다. 상주(尙州)에 살며 일찍이 18세에 문과(文科)에 차하(次下)로 급제(及第)하고 19세에 중시(重試) 차상(次上)으로 급제(及第)하여 장능수봉관(章陵守奉官)을 시작(始作)으로 관직(官職)에 나아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우체국주사(郵遞局主事), 철도국기사(鐵道局技師),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성진부윤겸성진감리겸성진항재판소판사(城津府尹兼城津監理兼城津港裁判所判事),경흥감리겸부윤겸경흥항재판소판사(慶興監理兼府尹兼慶興港裁判所判事),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농상공부임시박람회위원(農商工部臨時博覽會委員), 주차일본공사영사관(駐箚日本公使領事官), 종이품가선대부시종원부경(從二品嘉善大夫侍從院副卿),등을 역임(歷任)하며 개화기(開化期)의 산파역(産婆役)을 하고 고위(考位)는 증종이품가선대부내부협판(贈從二品嘉善大夫內部協辦)으로 비위(妣位)는 증정부인(贈貞夫人)으로 추증(追贈)하고, 조고위(祖考位)는 증정삼품통정대부비서감승(贈正三品通政大夫秘書監丞)으로 조고비(祖高妣)는 증숙부인(贈淑夫人)으로 추증(追贈)하고 증조고(曾祖考)는 종삼품통훈대부예식원좌장례(從三品通訓大夫禮式院左掌禮)로 증조비(曾祖妣)는 증숙인(贈淑人)으로 추증(追贈)하였다.

한일합병(韓日合倂)이 되자 관직(官職)을 물러나 단군교고양군시교장(檀君敎高陽郡施敎長)으로 봉직(奉職)하다 망국(亡國)의 한()을 달래지 못해 191751세에 돌아가셨고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경주최씨숙호(慶州崔氏淑鎬), 사과재두(司果載斗)의 따님이다. ()는 고양시대자동(高陽市大慈洞)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주신묘(柱臣墓) 우강(右崗)에 축좌합폄(丑坐合窆)

김태훈(金泰勳) 1889(高宗26) ?

태사공(太師公) 인관(仁琯)25세손 운암공(雲岩公) 옥남(玉男)10세손, 학현거사(鶴峴居士) 약여(若礪)의 아들, 평북변경(平北邊境)에서 상경(上京)하여 면학(勉學)에 열중(熱中)하였으나 내외정세(內外政勢)로 보아 국운(國運)이 기울고 있음에 안타까워하며 1914년 집안어른 당시(當時) 성균관장(成均館長) 김유제(金有濟)를 만나면서 자극(刺戟)을 받아 많은 자료(資料)를 수집(蒐集)한 갑인보(甲寅譜)를 찬()하였다.

김유제(金有濟) : 1852(哲宗3)-1914(倭政5)

강능참봉(康陵恭奉) 상목(商默)의 장남(長男)광능참봉(光陵恭奉)으로 있으면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삼사이랑동벽부승지(三司吏郞東壁副承旨)외에 금성군수(金城郡守)로 제수(除授) 가선대부 성균관장(嘉善大夫 成均館長)이 되어 신진유생(新進儒生) 김태훈(金泰勳)을 통하여 훌륭한 가사문화(家史文化)를 남기도록 하였으며 서문(序文)을 써줬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예산용관리(禮山龍官里) 경좌(庚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