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해평길씨시조(海平吉氏),길당(吉瑭),해평길씨조상인물,선산길씨

작성일 : 2017-11-09 14:46 수정일 : 2018-02-24 14:53

시 조

길씨(吉氏)의 본관(本貫)은 단본(單本)이고 시조(始祖)는 길당(吉瑭) 본명은 길녕(吉寧)이시다. ()나라에서 열경(列卿) 벼슬을 하시다가 동국문화계발(東國文化啓發)의 임무를 띠고 덕()() 문학(文學)에 뛰어난 팔학사(八學士)의 한 분으로 고조(高朝)에 오시여 문정공(文貞公)의 시호(諡號)를 받으시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의 벼슬에 올라 동국문화계발에 지대(至大)한 공헌을 하여 정사(正史)에 빛났다.


본관의 유래

선산(善山) 해평백(海平伯)에 봉()함으로서 관향(貫鄕)을 지명(地名)에 연유하여 해평(海平)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사적(史蹟)의 여하(如何)와 세대(世代)의 기하(幾何)를 고증(考證)할 수 없어 一大遺恨이 아닐 수 없다.

고려 후기의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인 길시우(吉時遇)부터 정상적인 세계가 이어지고 있다. 후손의 수가 많지 않아 귀성(貴姓)에 속하지만 역사상 명문(名門)의 자리를 누리고 있음은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위광(威光) 때문이라고 하겠다. 길재는 길씨로 보아서는 명문의 영예를 누리게 한 현조(顯祖)이고 유학계(儒學界)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유교(儒敎)의 정통(正統)을 세운 유림(儒林)의 종사(宗師)이다. 그는 지금주사(知錦州事)를 지낸 길원진(吉元進)의 아들로 18세 때 아버지를 찾아 개경(開京)으로 가서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권근(權近)등 당대의 쟁쟁한 석학(碩學)들로부터 성리학(性理學)을 배우고 후세에 유림의 종사가 될 기틀을 딱았다. 1386(우왕12) 문과에 급제, 1389(창왕1)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당시 나라의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노모봉양(老母奉養)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초야(草野)에 묻혀 노모에 효도하면서 오로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 끝내는 정몽주(鄭夢周)에게서 비롯되는 성리학을 김숙자(金叔滋)에게 전하고, 김숙자는 아들 김종직(金宗直)에게, 김종직에서 다시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에게 이어지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정통(正統)을 이루게 하였다.

해평길씨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이래 일천여년 남북한을 통해 10여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역대인물(歷代人物)

고려시대(高麗時代) 인물(人物)

길원진(吉元進) ():고천(高薦), ():송고(松皐) 보성판관(寶城判官)

길재(吉再)():再父, ():冶隱, 시호(諡號):忠節公 1386(우왕12)문과에 급제하고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387년 성균관 학정(學正), 이듬해에는 성균관 박사가 되어 공직

에서는 학생들을 집에서는 양가(良家)의 자제(子弟)들을 교육했다. 1389(창왕1)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조선(朝鮮) 건국 후1400(정종2) 세자(世子) 방원(芳遠,태종)에 의해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으나 거절하고 후진교육에 전념하여 김숙자(金叔滋)를 비롯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으로 학통(學統)을 잇게 하였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청풍서원(淸風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구미의 오산서원(吳山書院),공주의 삼은각(三隱閣)에 제햫되었다. 저서에 야은집(冶隱集), 야은언행습유(冶隱言行拾遺), 야은속집(冶隱續集) 고려 유신의 회고시가 등을 남겼다.

회고시가(懷古詩歌)--眞本 靑丘永言

五百年 都邑地匹馬로 돌아드니

山川依舊한데 人傑은 간데없네

어즈버 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조선시대(朝鮮時代) 인물(人物)

길사순(吉師舜)():翊虞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 길재의 아들. 세종이 즉위하면서 벼슬에 등용하였다. 이 때 길재가 아들을 서울로 보내면서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예의를 베푸는 일은 삼대(..)이래 드 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데 임금이 먼저 부르시니 은의는 다른 신하와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고려를 섬기는 마음을 본받아서 너는 너의 조선임금을 잘 섬겨라 하고 간곡히 타일렀다 한다.

길인종(吉仁種)():春植 임피현령으로 있으면서 정치를 청렴하고 간결하게 다스리자 김종직이 감사로서 그를 추어 올리면서 가전충효.세수청백(家傳忠孝,世守淸白)이라 하였고 사람들은 여섯 짐으로 왔다가 여섯 짐으로 돌아가니 가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고 칭찬했다.

길은봉(吉殷封)():여구(汝垢), 영암입향조(靈岩入鄕祖) 임진왜란 때 금산으로부터 영암군 북이면 장수동에 와서 살았으므로 이로부터 영암에 길씨가 살게 되었다.

길원(吉遠)():성심(成心) 부호군(副護軍)

길승단(吉承丹) ():重赫():문언(文彦) 성균관 진사로 여러 벼슬을 거쳐 승지에 올랐는데 1456(세조2) 왕의 뜻을 거역해 평안북도 영변으로 유배 당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해평으로 관적했다가 뒤에 해 평이 선산군(善山郡)에 속해지므로 선산(善山)이라 일컫게 되었다.

길겸(吉謙)():사익(士益) 병조정랑

길회(吉誨)():가해(可海) 1577(선조10) 알성문과에 丙科로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검열, 지평, 형조정랑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세자(世子)의 분조(分朝)에 수행했고 그 후 헌납직강 등을 역임했다. 호종의 공으로 원종공신 1등에 추록되었다.

길윤하(吉胤賀) 무과에 급제, 효력부위 겸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1624(인조2) 이 괄(李适)의 난 때 전공을 세웠고 1636년 병자호란 때 호군을 무찌르다 순절하여 정려의 특전이 내렸다.

길인화(吉仁和) ():양숙(良淑), ():입암(笠巖)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길군상(吉君祥)():여문(汝文), 通政大夫. 嘉山入鄕祖

길경립(吉慶立)():호중(浩仲)

무과에 급제, 예빈시정, 훈련원주부(主簿) 등을 지냈다. 1627(인조4) 정묘호란 때 전예록(田禮祿)과 함께 창의하여 적을 막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도 중군으로 소산성을 지켰으며 청강의 전투에서 적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다.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길성진(吉聖鎭) 초명(初名):성돈(聖敦),

():원표(元杓), ():시은(市隱) 가선대부(嘉善大夫) 부모를 효성으로 받들고 일가간에 화목하며 빈한한 겨레에게 널리 은혜를 베풀어 세 곳에 시혜비가 세워졌다.

길면주(吉冕周) 철종 때의 대학자로 길재(야은)詩文을 모아 야은속집(冶隱續集)을 간행했다.

길경조(吉景祖)():광중(光仲) 예조정랑

길인보(吉仁保) 사축서별제(署別提)를 지냈으며 1714년 암행어사 여필희(呂必禧)[평안도 사람들은 무지무례한 오랑캐와 같은 위인들]이라고 복명, 문무의 과거에 응하지 못하게 하는 처분이 내려지자 이에 분개한 그는 당시 설산군수(雪山郡守)인 이진업(李震業) 20여명을 데리고 소두(疏頭)가 되어 상경, 정계의 갖은 방해를 물리치고 7차에 걸친 상소 끝에 과거중 지처분을 철회시켰다.

길현범(吉顯範) 문과급제

길진국(吉鎭國) 문과급제

길이원(吉履元) 문과급제

길진오(吉鎭五) 문과급제

근대(近代) 인물(人物)

길인수(吉仁壽) 韓末,학자

길선주(吉善宙) 韓末, ():영계(靈溪).목사

33의 한 사람으로 처음에는 선도(仙道)를 닦으며 한의학(韓醫學)을 연구하다가 1879년 기독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고 이 해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평양지부를 조직했다. 1907(융 희1)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 목사 안수를 받아 한국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 평양 장대현(章臺峴)교회에서 신앙운동을 정진하는 한편 교육사업에 힘써 숭실학교

(崇實學校), 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했다. 3.1운동 때에는 기독교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 그 후 전국을 두루 다니며 전도사업에 전심하다가 평남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설교 중 사망했다. 저서에 해타론 (懈惰論), 강대보감(講臺寶鑑), 말세학(末世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