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연꽃을 사랑한 선비 연담공(蓮潭公) 곽예(郭預)

작성일 : 2017-03-20 13:30

연꽃을 사랑한 선비 연담공(蓮潭公) 곽예(郭預)
이 태어난 때(서기 1232년, 고려 고종 19년)는 시대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蒙古族의 잦은 침공으로 국력이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시기라 武臣들에 의하여 國權이 농락당하던 고려조정은 水戰에 약한 몽고의 침략을 피하기 위하여 都邑을 江華島로 옮긴 해였다.

  최충헌(1196~1219) -> 최이(1219~1249) -> 최항(1249~1257) -> 최의(1257~1258)로 이어지던 武臣政權은 몽고에 대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최의가 피살되고 난 후에 조정의 정권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무신정권의 수뢰 최의가 피살되자 몽고의 침략으로 피폐화된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1259년 6월 강화도에서 몽고와 和議條約을 체결함으로써 고려국은 몽고국(元)의 사위국으로 顚落되었고 이로부터 공민왕 즉위년인 1351년까지 약 100년간 몽고의 치욕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무신정권의 핍박과 전란이 극심한 중에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아래 사찰을 중심으로 온 백성의 護國精神에 의해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八萬大藏經을 완성하여 1398년 5월부터 慶南 陜川 海印寺에 보관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다.
  원나라의 도움으로 무신에게 빼앗겼던 왕권을 회복하면서 원종은 도읍을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조정을 친몽정권으로 강화하자 배중손이 삼별초(좌별초, 우별초, 신의군)를 이끌고 국권회복을 위한 亂을 일으켜 抗戰하다 1273년 濟州道에서 여몽연합군에 의해 무참하게 토벌된다. 

  공이 태어난 해는 고종이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겨간 때이다. 실로 공은 전란 중에 어렵사리 태어난 것이다. 공은 四門博士(정8품)이신 아버지 浮와 兵部尙書(정3품) 金浚의 손녀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병부상서 김준(개명전 김인준)은 1258년 유경, 임연등과 함께 최의를 살해한 인물로서 제24대 원종 임금과 사이가 좋지 않아 1268년에 아들 김주와 함께 살해됨으로서 무신정권은 종지부를 내리게 되었다.

  공의 초명은 王府, 자는 先甲이라 하였으며 공은 竹山朴氏 朴哄의 딸과 혼인하여 2남(雲龍과 雲鎭)과 2녀를 둔다. 공은 23세 되던 해인 1255년(고종42년) 과거에 장원(1등)으로 급제하여 全州司祿에 임명되었다. 고종조에서는 이렇다 할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공의 나이 29세인 1260년(원종 원년)에 詹事府 綠事로 전입되어 內園署令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는 고려의 서울이 아직 강화도에 있었다. 내직에 근무하면서 공은 고려의 자주적 정치활동이 보장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공의 가슴속에는 민족주의 정신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시기였을 것이다.


  
연담공(蓮潭公) 곽예(郭預) 초상

                 
청주에 있는 연담공의 묘소

공은 대대로 文臣 가문의 자손으로서 무신의 橫暴와 無道를 저주하였을 것이고 힘이 없음을 한탄하였으리라. 공의 성품이 내성적이나 다정하고 다감하였으며 이러한 성품이 文章과 書藝를 잘하게 되었으리라 본다.

元 세조 쿠빌라이의 신임이 두터웠던 원종 즉위 초기에는 원의 간섭이 다소 약화되었으나  왜구의 出沒은 빈번하여 남해안 백성의 곤란이 말이 아니었다. 1263년 2월 왜구가 김해를 침입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을 납치해 가자 고려조정은 使臣을 왜국에 파견하게 된다. 공의 나이 32살에 홍저(정 6품)와 함께 和親牒을 가지고 왜구에 납치된 주민 송환을 목표대로 달성하였으며 원종조에는 지금의 외무부에 해당하는 禮賓主簿兼直翰林院에 오르게 된다.

  제25대 충렬왕이 1274년 왕으로 오르자 왕은 공을 版圖正郞(정5품)으로 특별 기용하고, 고려조에 儒學을 진흥시키는 중책을 명령하여 寶文署待制 知制誥에 임용하였다. 그 후로 內侍佐郞(정5품), 國子監司業(종4품)으로 승차하였다. 공의 나이 48세 때에 右副承旨 재직 시 경상도에 가축의 전염병이 창궐하여 농경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소가 수없이 죽는 일이 자주 있었다. 소의 수가 적어지고 특히 항몽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소와 말이 줄어들어 農民經濟가 실로 어렵게 되자 畜牛의 감소를 방지키 위하여 牛馬屠殺禁止法을 건의하여 실시케 하였다.
다시 同知貢擧에 제수되었으나 상사보다 품계가 높다하여 사양하니 뭇사람의 칭송이 높았다. 특히 공이 과거 考試官으로 있을 때 승려 조영의 “날치기 인사집행”을 사전에 차단하여 권력자의 인사전횡을 막는 공정한 인사운용을 하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좌부승지(정3품), 國子監大司成, 文翰學士에 올라 오늘날의 인적자원부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어느 시대이건 조국에 해를 입히는 자가 있었다고 하던가. 당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홍다구는 개인적 원한으로 고려조정을 괴롭힌 인물이다. 홍다구는 쿠빌라이에서 고려가 왜국과 相通한다고 하여 왜국 정벌을 주도하게 된다. 이 정벌은 여원연합군에 의해 1차(1237년)에 4만 병력과 9백여 척의 전함으로 출발하였고, 2차(1281년)에는 15만 병력이 나아갔으나 원군은 겨우 3명이 살았을 뿐 모두 몰살되었으며 고려군은 당시 김방경 장군의 뛰어난 통솔로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공은 여원연합군의 대패와 비참하게 죽어간 군사들을 생각하여 마음이 아파 “바다 건너감을 슬퍼함”이라고 하는 感渡海를 지어 조국의 원수 홍다구 일당을 痛烈하게 비판 공격하였다.

  공의 나이 55세(1286년, 충렬왕 12년)에 知密直司事 監察大夫로 영진되어 政丞의 반열에 오른다. 감찰대부로 승차된 그 해 몽고국의 聖節을 축하하기 위하여 賀聖節使로 공이 원나라에 대사로 가게 된다. 공은 본디 성품이 강직하고 원의 복속국이란 치욕적인 국가 위치에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이 敵國 성절 축하사절 대표가 되었으니 마음의 病이 深化되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밀직사란 왕의 명령을 대행하여 출납과 군기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곳이라, 이곳의 우두머리인 공의 公評正大한 업무처리로 볼 때 원나라 벼슬아치들에게 줄 뇌물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일찍이 공은 感渡海란 시로 홍다구 일당을 비판한 적이 있었는데 원에 가면 이들의 보복이 있을 것을 모를 리 없는 공은 원국 가는 길이 험난하리라 고심하였을 것이다. 원에서 홍다구 무리에게 머리를 숙여 부탁과 애걸을 하여야 할 것이니 憤痛이 터질 일이다. 공은 자신이 예측한 대로 원나라 가는 도중에 맘의 病이 심화되어 향년 55세로 絶命하고 만다. 아! 어찌 슬프고 분하지 않으리오. 공의 죽음에 대한 이견이 있으나 조국을 반역한 無道들의 치밀한 훼방이 어찌 없었겠는가! 공은 결국 분을 삭이지 못하고 타국에서 그 命을 다하였거나, 타인에 의한 殺害 등도 있었을 것임이 미루어 짐작이 간다. 공은 逝去한 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안장되었다가 지금의 청주시 명암동 약수터 후편에 이장하여 崇尙의 큰 인물로 現存하고 있다.